버리고 떠나기 (1)
"이러시면 곤란하지, 선생님.."
시간에 늦은 나를 보며 수아의 엄마는 대뜸 반말 조로 나왔다.
그녀가 기분이 나쁠 땐 언제나 그런 말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
었다.
"죄송해요. 버스가 밀려서..."
"우리 수아 성적표 나온 거 보셨어요? 이러면 곤란한데 정말. 회
장님이 다른 선생 붙여줄까 하시는 걸 아이가 그래도 선생님을
따르니까 내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생각해 보세요. 지난 번 보
다 더 나빠졌잖아요."
나는 수아의 성적표를 들여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제 책임이 크지만, 수아는 정말 공부할 마음이 없
어요.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네요. 다른 선생을 구해 보시는게
어떻겠어요? "
"선생님 너무 무책임하게 말하는 거 알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더 잘 아시잖아요? 처음에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이 아이는 사실 어렵겠다고요. 그냥 붙들고 앉
아만 있어 달라고 하신 분은 어머니 시잖아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생한테 한 달에 준 돈이 얼만데? 정
말 그냥 붙들고 앉아만 있었다는 말이 예요?"
"제가 머리를 열고 억지로 밀어 넣을 수야 없지요. 안 담겠다는
아이한테 뭘 넣겠어요?"
"그게 선생이 할 일이잖아요?"
"차라리 유학 보내지 그러세요? 저는 그런 능력은 아무래도 없
는 거 같네요."
나는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서 자리를 일어섰다.
"아니, 잘하는 애들 옆에서 끌어주는 거야 누가 못해요? 그냥 미
안하다고 다음 시험 때는 좀 더 신경 쓰겠다고 하면 될 것을. 나
한테 이러면 실수하는 거예요. 알아요?"
"모르겠는데요?"
모욕당했다고 생각했는지 파들파들 떨며 서 있던 그녀는 내가 돌
아서자 현관문을 꽝 소리가 나게 닫아버렸다.
나야말로 더 이상 이런 모욕 참으며 돈 벌러 다니기가 싫어졌
다. 돈이 필요치 않다고 배쨩부리며 살 주제는 못 되었지만, 이
런 식으로는 더 이상 견디기가 싫어졌다. 그럼 나는 무얼 해야
할까? 노력한 것보다 큰돈을 만지며 살다 한 달 내내 뼈빠지게
일해도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 수 있을까.
나는 그만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서울 근교였지만 조용한
시골인 집에서 한달 만이라도 푹 쉬고 싶어졌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이 되어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태진이나 그냥 두고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가엾은 한 아
이, 윤수가 있었다.
-태진씨, 어디 있는 거야.
버스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나는 조용히 그를 불러 봤다.
나는 이제 그가 나를 잡아 주기를 원했다. 당당하게 내 앞에 나
타나 이제 지쳐 버린 나에게 힘을 주기를 바랬다. 걱정하지 말라
고, 곧 이루어 내겠다고,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켜 주기를 바랬
다. 그가 그런 모습으로 돌아 온 다면 나는 다시 그를 위해 얼마
든지 더 나를 참아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 오피스텔 안에서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초라한 모습
으로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라면을 끓여먹고
함부로 놔둔 냄비와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며칠이나 안
갈아 신었는지 양말에서는 고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내
남자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그렇게도 내
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가..아니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인
가. 저런 모습을 허물처럼 벗어 던지고 어느 날 그는 멋있는 왕
자로 돌아와 줄 것인가...그런 날을 나는 기다리는 것인가.
늦은 밤이 되도록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오래도록 그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늘이 오기까지 함께 한 세월만큼 오랜추억이 내
게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의 여자였다. 이제와 새삼스레 다른
사람을 사랑 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내 몸과 마음은
이미 그에게 너무 많이 열려 있었고, 그런 채로 우리는 너무나
멀리 함께 와 버렸다. 손을 놓아 이제 서로 헤어진다면 나는 어
디서부터 다시 내 길을 찾아갈 지 막막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잡은 손을 놓아 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그가 남겨놓은 시험을 마치고 나면,
그리고 나서, 돌아서서 가는 거야. 그래. 지금은 때가 아니야.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에 깨어났는지 그는 일어나 앉아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배고프지?"
"......"
"저녁 먹자."
나는 상을 차리고 앉아 묵묵히 밥을 떠 넣었다. 그도 아무 말 없
이 다가와 밥을 먹었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먹는 다는 것 그것은 지독한 싸움이었다. 나
는 체하지 않으려고 꼭꼭 씹어 삼키고 있었다.
"정연아, 나 자신이 없다."
반쯤 먹다 말고 결국 지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만 두지 그래."
"정말 그래도 되겠니?"
결국 밥을 다 먹지 못하고 나도 수저를 놓았다.
"태진씨 그건 내게 물을 말이 아니잖아?"
"도저히, 안될 거 같아. 어머니도 저러시고.."
"알아서해."
"정연아...여태까지 니가 너무 수고했는데, 나 때문에, 그래서
나는, 도저히 그만 둘 수가 없었어."
"나 때문이라고?"
나는 벌떡 일어섰다.
"나야말로 태진씨 때문에 여태 이렇게 살았는데, 나 때문에 그
만 둘 수 가 없었다구?"
"정연아..."
그는 나를 안으려 했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그를 밀쳐냈다.
"싫어, 이제는.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 당신 마음대로
해."
"정연아,"
우격다짐으로라도 나를 안으려고 하는 그를, 그가 결국 하고 싶
은 말을, 내게서 얻어내고 싶은 말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 속아주지. 이게 마지막이야. 너를 놓아 보내려고,,,이제
마지막이야..
벗겨진 옷가지를 줏어 입으며 나는 그가 바라는 대답을 들려주었
다.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었다.
"어머니 치료비, 내일 부칠게. 얼마 남지 않았잖아. 제발 다른
생각은 이제 하지 말아. 이번 한번만 더 해보고 때려치우자 우
리.."
대답대신 담배를 피워 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