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석되어 가는 사랑 앞에서.
윤수는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속삭이듯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 가엾은 아이에게, 아무 일없었던 것처럼, 숙제 잘 해놓고, 기
다리라고, 말해줬다.
현지와의 수업을 끝낸 후에, 현지 엄마에게, 알고 있었느냐고 물
었다. 그녀는 애매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좋은 일 하시는 거잖아요...선생님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말
좋은 분 같아서, 죄송해요. 미리 말씀 드렸어야 하는데 그랬으
면 선입관을 가지게 되실 거 같아서요. 아마, 보수는 항상 잘 챙
겨 드릴 거예요. 정말 가정교사 자리도 그 애에게는 찾기가 쉽
지 않아서요.."
"그런 뜻이 아니라, 미리 말씀 해 주셨다면 그 아이를 제가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럼, 계속 봐 주실 건가요?"
"네. 그런데 현지 어머니도, 그런 걸 믿으세요?"
"그런 거라니요?"
"앞날을 맞춘다는 거, 무당이 된다는 거, 그런 거요."
그녀는 다시 애매하게 웃었다.
"글쎄요, 아무튼 저희는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확장하지 말
라는 걸 해서 손해 본 적도 있고, 하라는 대로 해서 크게 성공하
기도 했으니까요. 해 될거는 없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전혀 그
런 쪽으로는 안 믿으시나봐요."
"네, 저는 종교는 없지만,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어요. 다른 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그런 병을 앓고 있는데 어른들이 속
수무책으로 방치하다니요.."
"선생님 그건, 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는 병이예요. 틀림없이요."
"어떻게 생각하시든, 아무튼 그 아이를 계속 봐 주신다니 저로서
는 뭐라고 말씀 드려야할지. 아무튼 감사해요. 제 얼굴도 있고
하니까, 잘 지도해 주시기 바래요. 그리고 참, 현지요, 미국인
선생님한테 한 시간 정도 공부시킬까 하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
세요?"
"그럼 저는 이달로 그만해야 겠네요."
"아니지요. 선생님은 무슨 말씀을. 입시는 또 입시잖아요..호
호, 오해하지 마세요. 작년에 이 앞 동 유라, 선생님 덕분에 연
대 간 거 다 알고 있어요.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거는 아니 예
요. 그러나 아무래도, 영어다 보니 그 쪽 선생님 모셔다 발음 교
정도 받고, 뭐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본인이 원하기도 하고요."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뭐.현지가 더 바쁘겠네요."
"공부 욕심이 워낙 많아서요. 호호.."
"네, 그럼..."
자기 엄마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현지는 방안에 들어앉아 있
었다. 항상 현관 앞에서 인사시키는 나를 조금 못마땅해하는 현
지 엄마를 못 본척하고 나는 방에다 대고 소리쳤다.
"현지야, 선생님 간다."
헤드폰을 끼고 있는지 조용하기만 한 그 방은 열리지 않았고, 나
는 어쩔까 잠시 망설이다 그냥 돌아섰다.
"피곤해서 잠들었나 보네요..그만 갈게요."
"어머, 그런가봐요, 네 선생님, 그럼.."
복도식 아파트라 현지 방에서 그녀와 현지가 나누는 대화 소리
가 들려나왔다.
"자니?"
"안자."
"왜 안나왔어, 그런데?"
"지가 뭔데, 맨날 인사시켜, 짜증나 죽겠어."
"어머, 얘는 가다 들을라, 시간 되면 교습 받겠다고 줄 선 애
들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엄마 점보는 데서 너 저 선생 덕에 서
울대 간댔어. 아무 소리 말아. 이것아.."
"알았어, 엄마 좀 나가 줘, 말시키지 말고.."
그랬었나, 나는 그럼 좀 더 당당하게 굴어도 당분간은 지장이 없
을지도 모르겠군.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별로 불리할 것도 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명문대를 나왔다는 재원이었다는 여자가, 저
럴수가 있나 싶어서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다음 스케쥴을 확인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
렸다.
"네. 김정연입니다."
"언니, 나 태희예요."
"아, 네. 잘 지냈어요."
"언니,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요?"
"왜 그러세요?"
"오빠가 없어졌다면서요?"
"오빠, 돌아 올 거예요. 기다려 보세요. 태희씨한테도 연락 없었
나요?"
"엄마 돌아가시게 생겼어요. 아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예
요?
"뭘 하다니요?"
"오빠 찾으러 안가요?"
"태희씨가 가봐요. 알잖아요, 어디 있는지. 전에 있던 그 절에
있겠죠."
나는 정말 남의 일 말하듯 했다.
"언니,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러다 오빠가 모두 다 때려치우고 말면 언니가 다 책임 질거예
요?"
"그만두고 말고는 태진씨가 결정하는 거지요."
전화는 탁하고 소리나게 끊겼다.
나는 왜 이렇게 태진과의 일들을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걸까.
그 동안 잘 참아 왔으면서, 아직도 태진을 떠올리면 안타까우면
서도, 그러면서도 나는,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태진이 돌
아와서 내게 다시 손 내민다해도 이제 그 손을 잡고 싶지 않았
다.
사랑도 세월에 따라 지쳐갈수 있는 걸까. 나는 이 길고도 쓸쓸
한 사랑의 종착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걸 줄 때 더 빛나고 아름다운 거 라지만, 그건 내
가 감당할 사랑의 깊이가 못 되었다. 미래를 위해서, 태진이 고
시에 붙기만 하면, 그런 주문을 수없이 외우면서 나를 지탱해 왔
지만, 그러나 나는 화려한 미래를 위해서 견디는 오늘이 이제 싫
어졌다. 애초에 내가 바라는 삶이 그런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태진이 원했고, 그가 원하는 걸 이루게 하고 싶었었던 것뿐이었
다.
한강을 건너며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바다로 흘러가고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