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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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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의 비밀


BY 로미 2000-10-24


윤수의 비밀


비가 오는 그날 저녁, 한 팀으로 맡아 온 아이 중에 하나가 연

락 없이 늦어졌다. 돌아가며 한달씩 정해진 집에서 공부를 했었

는데, 하나가 늦으면 전체적으로 늦어지기에 나는 초조했다. 그

리고 화가 났다.

"진수는 어디 갔다니?"

"글쎄요, 아까 스포츠센터에서 헤어졌는데, 어딜 갔지?"

밖에서는 그 집주인인 형진의 엄마가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왔을테고 내가 언성을 높이는 게 혹시 자

기 아들 때문인가 귀를 문에 대고 있곤 했다.


"전화해봐, 걔 핸드폰 있지?"

"꺼놓았어요."

"이 자식이...."

나는 가끔 있는 일인데도 더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화내지 않

아야 한다는 원칙을 나 스스로 어기고 있는 거였다. 태진 때문이

었다. 입원비를 보내야 한다며, 여러 번 푸념 조로 전화를 했어

도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고시원에서 어디

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더 이상 무릎꿇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내가 속상하고, 그가 미웠고, 그의 가족이 더 견딜 수 없

었다.


"선생님, 진수 왔네요,,호호, 어딜 갔었니? 선생님 기다리시잖

아, 과일 좀 내 올까요?"

"수업중에 아무것도 안 먹는 거 아시지요?"

나는 고개도 안 들고 그렇게 말했다. 안 봐도 그녀는 얼굴이 확

붉어졌을 터였다.

"너, 연락도 없이 뭐하는 놈이니?"

"영화 좀 보고 오는 길이예요. 엄마가 그러라고 하셨는데요?"

"그럼, 여기 기다리는 나나, 다른 친구들은 상관없다는 거니?"

"엄마가 전화 한 줄 알고, 죄송합니다."

여전히 싱글거리면서도 그 애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나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더 이상 그 애를 나무

란다는 것은 다음 수업부터는 보지 않는 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업은 죽을 쒀야 했다.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

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유난히 그 수업이 힘들었

다. 아이들도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선생님, 혹시요, 애인하고 싸우셨어요?"

가방을 둘러메면서 한 녀석이 느물거리며 물어왔다.

"오늘 그럴만 했잖아."

"선생님, 평소에 그렇게 화 안내셨어요, 화해하시지 그러세요?"

"쬐그만 게, 까불지 말고 다음 수업 때 준비나 잘 해와, 늦지 말

고,,,"

"제가 선생님 보다는 한참 더 클걸요."

"선생님, 치즈케??한 조각 드시고 가세요, 제가 쏠께요."

"됐어. 너희들끼리 가라."


고급 생과일 주스와 작은 조각 케?揚?파는 곳으로 간식을 먹으

러 밝게 걸어가는 그 애들을 보면서, 풍요 속에서 아무런 근심

없이 자란 아이들이란 저런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언제

나 얼굴에 티 한점 없는 그 아이들은 남에게 상처를 준다는 게

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애들이 간다는 스포츠센터나 때마나 가

는 해외여행을 갈 수 없고, 가 본적도 없는 나라는 사람은 악의

없이 해대는 그 아이들의 말에 때로 상처 받았지만, 아이들은 그

걸 알리 없었다.


예정보다 조금 더 늦었지만 나는 윤수에게로 향했다.

아무 때나 선생님 편한 시간으로, 라는 조건은 나를 편하게 했

다.돌아온다던 날에 윤수아빠와 큰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는지 윤

수는 지하철 역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왜 여기 나와있어?"

"선생님, 오늘 공부 안 하면 안돼요?"

"왜? 숙제 안 했구나?"

"아니 예요, 집에, 집에 가기 싫어서 그래요."

"왜? 아버지 안 오셔서 무서워서 그러니? 선생님이 왔잖아. 우

리 떡볶이랑 오뎅이랑 사먹고 가자."

윤수는 말이 없었다.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빈집에 아이 혼자

무섬증을 타서 그런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윤수야,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나는 타이르듯 말하고 그 애 손을 잡았다. 손이 몹시 차가웠다.

그 한기가 내 뼛속까지 타고 올라오는 듯 했다.

"손이 왜 이렇게 차니,,"

문득 더 안쓰러워서 나는 그 애를 안아주고 싶었다.

귀퉁이가 벗겨져 일어난 작은 책상을 펴면서도 윤수는 말이 없었

다. 항상 재잘대던 아이가 아무 말이 없자 나는 어색해졌다. 집

안은 이상한 침묵으로 더 무거웠고, 신당인 듯한 작은 방에서 번

져 나오는 촛불의 그림자가 날름거리는 귀신의 혓바닥처럼 타오

르고 있었다.


"숙제 한 거 볼까."

아무말없이 공책을 내밀던 윤수는 갑자기 누군가 간지럼을 태우

는 것처럼 몸을 틀면서 괴로워했다.

"뭐하니? 왜 그래?"

"아이, 하지마!"

마치 누가 등뒤에 있는 것처럼 윤수는 몸을 긁적이며 화를 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소름이 돋았다.

"윤수야, 왜 그래?"

"동자신이, 자꾸,,,하지마!"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나 앉았다.

그때였다. 윤수가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 입에서는 남자애의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정신이 아득했졌다.

"이 년아, 할미 제삿날도 잊어 먹은 년, 할미 상에 과일이라도

한 개 올려 놔 봤냐? 딸년들은 이래서 소용이 없어!"

그 말을 끝내고 윤수는 울면서 뛰어나가고 나는 너무 놀라서 멍

하니 앉아만 있었다.


"기어이, 그럴 줄 알았지...."

퍼뜩 소리나는 쪽을 올려다보니 젊은 청년 하나가 서서 나를 내

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윤수 작은오빠요. 놀라셨나보군요."

"네,,,네.."

"아무리 귀신들 이라지만, 저 어린것한테, 아직 여덟 살도 안 되

었는데, 가엾은 것."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 나서 그는

내게 물었다.

"선생님, 이제 못 오시겠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