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의 비밀
비가 오는 그날 저녁, 한 팀으로 맡아 온 아이 중에 하나가 연
락 없이 늦어졌다. 돌아가며 한달씩 정해진 집에서 공부를 했었
는데, 하나가 늦으면 전체적으로 늦어지기에 나는 초조했다. 그
리고 화가 났다.
"진수는 어디 갔다니?"
"글쎄요, 아까 스포츠센터에서 헤어졌는데, 어딜 갔지?"
밖에서는 그 집주인인 형진의 엄마가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왔을테고 내가 언성을 높이는 게 혹시 자
기 아들 때문인가 귀를 문에 대고 있곤 했다.
"전화해봐, 걔 핸드폰 있지?"
"꺼놓았어요."
"이 자식이...."
나는 가끔 있는 일인데도 더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화내지 않
아야 한다는 원칙을 나 스스로 어기고 있는 거였다. 태진 때문이
었다. 입원비를 보내야 한다며, 여러 번 푸념 조로 전화를 했어
도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고시원에서 어디
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더 이상 무릎꿇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내가 속상하고, 그가 미웠고, 그의 가족이 더 견딜 수 없
었다.
"선생님, 진수 왔네요,,호호, 어딜 갔었니? 선생님 기다리시잖
아, 과일 좀 내 올까요?"
"수업중에 아무것도 안 먹는 거 아시지요?"
나는 고개도 안 들고 그렇게 말했다. 안 봐도 그녀는 얼굴이 확
붉어졌을 터였다.
"너, 연락도 없이 뭐하는 놈이니?"
"영화 좀 보고 오는 길이예요. 엄마가 그러라고 하셨는데요?"
"그럼, 여기 기다리는 나나, 다른 친구들은 상관없다는 거니?"
"엄마가 전화 한 줄 알고, 죄송합니다."
여전히 싱글거리면서도 그 애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나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더 이상 그 애를 나무
란다는 것은 다음 수업부터는 보지 않는 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업은 죽을 쒀야 했다.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
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유난히 그 수업이 힘들었
다. 아이들도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선생님, 혹시요, 애인하고 싸우셨어요?"
가방을 둘러메면서 한 녀석이 느물거리며 물어왔다.
"오늘 그럴만 했잖아."
"선생님, 평소에 그렇게 화 안내셨어요, 화해하시지 그러세요?"
"쬐그만 게, 까불지 말고 다음 수업 때 준비나 잘 해와, 늦지 말
고,,,"
"제가 선생님 보다는 한참 더 클걸요."
"선생님, 치즈케??한 조각 드시고 가세요, 제가 쏠께요."
"됐어. 너희들끼리 가라."
고급 생과일 주스와 작은 조각 케?揚?파는 곳으로 간식을 먹으
러 밝게 걸어가는 그 애들을 보면서, 풍요 속에서 아무런 근심
없이 자란 아이들이란 저런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언제
나 얼굴에 티 한점 없는 그 아이들은 남에게 상처를 준다는 게
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애들이 간다는 스포츠센터나 때마나 가
는 해외여행을 갈 수 없고, 가 본적도 없는 나라는 사람은 악의
없이 해대는 그 아이들의 말에 때로 상처 받았지만, 아이들은 그
걸 알리 없었다.
예정보다 조금 더 늦었지만 나는 윤수에게로 향했다.
아무 때나 선생님 편한 시간으로, 라는 조건은 나를 편하게 했
다.돌아온다던 날에 윤수아빠와 큰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는지 윤
수는 지하철 역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왜 여기 나와있어?"
"선생님, 오늘 공부 안 하면 안돼요?"
"왜? 숙제 안 했구나?"
"아니 예요, 집에, 집에 가기 싫어서 그래요."
"왜? 아버지 안 오셔서 무서워서 그러니? 선생님이 왔잖아. 우
리 떡볶이랑 오뎅이랑 사먹고 가자."
윤수는 말이 없었다.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빈집에 아이 혼자
무섬증을 타서 그런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윤수야,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나는 타이르듯 말하고 그 애 손을 잡았다. 손이 몹시 차가웠다.
그 한기가 내 뼛속까지 타고 올라오는 듯 했다.
"손이 왜 이렇게 차니,,"
문득 더 안쓰러워서 나는 그 애를 안아주고 싶었다.
귀퉁이가 벗겨져 일어난 작은 책상을 펴면서도 윤수는 말이 없었
다. 항상 재잘대던 아이가 아무 말이 없자 나는 어색해졌다. 집
안은 이상한 침묵으로 더 무거웠고, 신당인 듯한 작은 방에서 번
져 나오는 촛불의 그림자가 날름거리는 귀신의 혓바닥처럼 타오
르고 있었다.
"숙제 한 거 볼까."
아무말없이 공책을 내밀던 윤수는 갑자기 누군가 간지럼을 태우
는 것처럼 몸을 틀면서 괴로워했다.
"뭐하니? 왜 그래?"
"아이, 하지마!"
마치 누가 등뒤에 있는 것처럼 윤수는 몸을 긁적이며 화를 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소름이 돋았다.
"윤수야, 왜 그래?"
"동자신이, 자꾸,,,하지마!"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나 앉았다.
그때였다. 윤수가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 입에서는 남자애의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정신이 아득했졌다.
"이 년아, 할미 제삿날도 잊어 먹은 년, 할미 상에 과일이라도
한 개 올려 놔 봤냐? 딸년들은 이래서 소용이 없어!"
그 말을 끝내고 윤수는 울면서 뛰어나가고 나는 너무 놀라서 멍
하니 앉아만 있었다.
"기어이, 그럴 줄 알았지...."
퍼뜩 소리나는 쪽을 올려다보니 젊은 청년 하나가 서서 나를 내
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윤수 작은오빠요. 놀라셨나보군요."
"네,,,네.."
"아무리 귀신들 이라지만, 저 어린것한테, 아직 여덟 살도 안 되
었는데, 가엾은 것."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 나서 그는
내게 물었다.
"선생님, 이제 못 오시겠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