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서른 하나]... 바람꽃 상처
승빈은 몇일간 무슨 정신으로 살아 왔는지는 모를 시간들이였다.
세희의 아파트에서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돌아 왔지만, 그것이 무엇
이였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꿈을 꾼 듯. 쓸데 없는 나쁜 상상
을 잠시 한 것 같은... 그런 혼란함속에서 몇일을 보냈다.
바람꽃... 바람꽃... 승빈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세희가 힘들어
하며, 그 조짐을 충분히 보여주었는데 그 것을 알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왜 알지 못했을까? 왜 느끼지 못했을까? 왜 잡지 못했을까? 왜
생각지 못했을까?'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승빈의 손목에서 여전
히 저만의 길을 위해서 쉼없이 움직이고 있는 시계를 바라 보았다.
세희가 선물한 시계. '그 때만 알았어도... 그 때 알았어야 했다..'
승빈의 자책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진료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담배연기로 인해 환기를 위한 간호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전에
없던 원장 선생님의 모습에 모두들 긴장해야만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승빈의 침울한 표정이 이어지고 있는 터라, 명은
에게는 그 보다 더한 고문이 없었다. 대전을 정리하고 떠나 왔을 때.
명은이 힘들어 할때는 오히려 조용하게 넘어간 승빈이였다. 이제 가
정으로 돌아와 안주 하려는 명은에게 더 할 수 없는 죄책감을 더해
주고 있었고, 명은은 더욱 더 가정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었다.
"요즘 병원에 무슨일 있어요? 그럴리 없지만. 혹시 무슨 의료 사고
라도 있었어요?"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의료사고' 맞았다. 승빈은 세희의 친구의자 그녀를 보살폈어야 하
는 의사였다.
"주말에.... 가평에 가지 않을래요?"
"가평? 그러지..."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또다른 고민이 생겨났다.
누님을 떠 올리며, 또 한번 아픔을 겪으실 것 같았다.
겨울이 거의 끝나갈 즈음 승빈이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아 갔다. 텅
비어 있는 듯한 세희가 살던 그 아파트에 차를 대고 하염없이 머물다
돌아가곤 하던 횟수가 차츰 줄어들며,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 앉아 있
었다.
주섬 주섬 지난 겨울의 상처를 치료하듯이 민간호사의 손을 빌려
책상을 정돈하고, 묵은 먼지를 털어 내듯이 진료실을 청소하다가 승
빈은 또 다시 지난 시간들을 거슬러 과거에 돌아가 있었다.
"민 간호사.. 조금 있다가 하자.. 아니, 내가 할께.. 그만 됐어."
한참 널려져 있는 진료실에서 민 간호사를 내보내고 승빈은 채 다
읽지 못했던, 세희의 편지를 꺼내어 들었다.
『선생님.
칠흑같이 어두운 이곳 바다 위에 바람 따라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예상했듯이 많은 눈이 내리네요.
이번 겨울은 몹시 추운 겨울이네요.
추위가 가슴 깊숙한 곳까지 뚫고 들어와
제 모두를 얼려놓는 것 같습니다.
얼어붙는 제 가슴에 유일하게 온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하면 가슴 저리게 뭉클함으로 눈물부터 나게 하는 나의 아이들.
이 딸의 어찌하지 못하는 삶으로 한숨이 쌓여
가슴에 커다란 멍울이 되어버린 아픔을 부여잡고 사시는 부모님.
그리고,......
감사함과 죄송함으로 가득한 선생님입니다.
많은 비가 내렸던 그 어느 날부터 선생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친절이
가슴 깊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 남에게 받은 가장 따뜻한 마음 이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오래 오래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가장 진실하고, 가장 깨끗함으로 제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
사랑했습니다.
태어나 선생님 사랑을 담고 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선생님과 손가락 걸고 다짐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됨을....
죄송합니다...
이제는......
선생님 곁을 맴도는 미풍으로 남겠습니다.
옷깃과 머리결과 손끝에 스치는 작은 바람으로......
언제나
행복하세요....
강 세희 드림.』
"잘가요.. 이제는 보내 줄께요.. 바람꽃처럼 왔다가 상처로 남은
사람.. 잘가요.. 이제 편안하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