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스물 여섯]... 암흑
"대전에 뭐하러 다니는 거냐?"
이미 모든 상황을 눈으로 보아 짐작하고, 아니 한평생 살아오신 삶
의 잣대로 모든 것을 계산 해 놓은 노기가 가득한 아버지의 질문이
명은의 온 몸에 바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명은은 쥐구멍을 찾아야 했다. 이미 겁에 질려 온 몸이 떨려오고
정신이 아득해 지고 있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씀???"
"대전 네 살림집에 있는 그.. 그.. 남자 물건들 누구꺼냐?"
정말로 앞이 노랗게 변하며 1m 앞에 있는 부모님이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뒷 목덜미에서 등을 따
라 또르르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명은은 침착하자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해 보았다.
"누구 거라뇨? 김 서방꺼죠."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로 대답을 하며 약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
그 순간 어머니의 안타까운 빛이 얼굴에 드러나더니 순간적으로 아버
지의 굵은 손이 명은의 뺨을 때리고 지나갔다.
"네가 지금 어디서 거짓말을 늘어 놓는 거냐? 죽을죄를 지었습니
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내
가 창피해서 세상에 얼굴을 들고나설 수가 없다."
명은은 옆으로 쓰러졌던 몸을 일으키며 아픔 때문인지 상황에 따른
두려움 때문인지 눈물을 쏟아내었다.
"내 김 서방한테 열쇠를 건네 받을 때. 자신도 계약할 때 가보고
안 가봐서 지리를 안내해 드릴 수가 없다고 다음에 너 오면 함께 가
시라고 당부하는 걸 마다하고 갔었다. 계약할 때 김 서방이 자기 옷
들하고 물건들하고 그리고 양말에 빤스까지 갖다 놓았냐?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나중에 김 서방에게 물어보자. 그랬냐고."
아버지의 화가 난 음성이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명은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명명백백한 죄인 이였다.
"이것아 도대체 어쩌자고 그랬니? 아버지랑 내가 애들하고 김 서방
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바로 처다 볼 수 있겠니?"
어머니가 한숨과 눈물을 흘리시며 명은의 어깨와 등을 힘없이 때리
시고 있었다.
"옷가지는 그렇다 치고 그곳 경비가 나한테 그러더라. 원 세상천지
에 별일을 다 겪지 내가. 허참..... [아저씨가 가끔 낮에 계시던데 오
늘도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아! 그게 경비로써 베푸는 친절이냐? 내
가 니 애비라고 하니까 당신 딸이 바람 피고 있소. 하고 일러주는 말
이지?"
명은은 아무 할말이 없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더군다나 남편이 아닌 부모님에
게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당장에 학교 때려치우고, 김 서방에게 사실대로 고백하고 도장 찍
어라! 내 김 서방 얼굴 볼 면목이 없다."
"여보. 그치만 어떻게 애들도 있는데."
"애들? 애들 걱정하는 년이 저러고 다녀? 제가 집안을 걱정하고
부모와 형제들을 생각하는 사람이야? 바람난 미친년에 불과하지. 어
디서 애들을 들먹여? 애들도 김씨 자식이니 넘겨주고 깨끗이 물러
나!"
"아버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명은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이혼이라니? 애들하고 떨어지라
니? 날벼락 이였다. 물론 자신이 지은 잘못은 알지만 명은은 이혼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남편의 입장도 아닌 친정 아버지가 이혼
을 하라고 하고 있으니 명은은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 듯 했다.
"네가 말을 안 하면, 내가 김 서방한테 머리 조아리고 직접 말하겠
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죽을죄를 지었어요. 시키시는 대로 다 할께요.
하지만 이혼은 아니에요. 아니 이혼도 해야 한다면 하겠지만 애들은
안되요. 제 죄로 이혼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애들을 못 보게 될 거예
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애들만은 안 되요. 아버지 제발."
"너하고 눈이 맞은 그놈 연락처 좀 내놔봐라."
"아버지......"
명은은 세상이 끝났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
순간만은 죽고 싶은 마음 이였다. 어쩌다 자신이 여기까지 왔는지 때
늦은 후회가 가득했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노기는 여전하셨다. 단 한번도 움직
임이 없이 노려보는 듯한 눈빛으로 창 밖만을 응시하고 계셨다. 명은
을 앞세워 따라 나선 아버지 때문에 민재에게 귀뜸이라도 해줄 방법
이 없었다.
대전 톨게이트를 지나 시내에 들어서면서 명은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운전을 하고 왔는지 정신이 아득했다.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오직 민재가 오피스텔에 없기를 바랄 뿐이였
다.
"어서 문 열어라."
문을 열고 현관에 있는 민재의 신발을 확인하는 순간 이제 정말 끝
이구나 싶었다.
"어서와. 일찍 왔네?"
"....."
"왜? 어디 아프니?"
"험."
민재의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 하는
얼굴 이였다.
"내가 명은이 애비되는 사람이요. 내 할말이 있어 이렇게 만나러
왔오."
민재의 얼굴빛이 굳으며 긴장하고 있었다.
"난 이런 상황이 남자의 잘못이다 여자의 잘못이다 따지기 전에 내
가 딸년을 잘못 키운 탓이라고 생각하오."
"....."
"당신. 내 듣자니 가정도 있다던데, 당신 가정과 내 딸년 가정 깨고
둘이 합칠 생각 이였오?"
"....."
"말을 해보시오. 제는 이혼은 죽어도 안된다던데 아! 당신은 이혼이
라도 각오하고 벌린 일이요?"
"내 사위가 당신을 만났다면 나보다는 젊은 기운에 당신과 제를 죽
도록 패주기라도 했겠소 만 난 늙은이라서 말로만 떠들어야 한다는
것이..... 휴..........."
"죄송합니다."
"내 당신 가정에까지 알려 쑥대밭을 만들어 놓기 전에 여기서 깨끗
이 끝내시오. 다시는 명은이 근처에 얼쩡거리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마
시오. 차 후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내 정말 가만 두지 않겠소.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당신의 전화번호도 모두 바꾸시오. 넌 어여
이 사람 짐 싸서 보내라!"
"죄송합니다."
민재는 명은에게 눈길 한번 주지 못하고 되돌아서 신발을 신고 나
가야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씁쓸함이 느껴졌을 뿐이였다.
이번엔 좀 길다. 이번엔 좀 색다른 감정이다 싶었는데. 끝은 같았다.
애들 불장난에 불과한 이 끝은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끝이 조용
했다는 점이다.
민재는 쓴웃음 한 자락과 담배연기 한 모금. 그리고 명은이 주섬주
섬 챙겨준 쇼핑백을 쓰레기통에 떨구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