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스물 다섯]..... 위기의 아침
날씨는 너무 들뜨거나 처지지 않을 정도로 빗물이 소리 없이 유리
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승빈은 거실 창에 기대어 비에 젖는 주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디오에선 귀에 익은 팝송이 흘러나오는데, 창 밖
을 향한 시선은 어딘지 모를 곳에 고정된 채 목석처럼 서 있었다.
"출근 안해요?"
"응. 해야지. 생각할게 좀 있어서."
"커피 줄까요."
"그래. 근데, 제주도는 어땠어?"
"응? 네?"
"관광도 좀 했나?"
"아... 아니. 그냥 세미나 시간에 쫓겨서.. 그냥 그랬지모"
명은은 마시던 커피를 뱉어 낼 뻔했다. 승빈의 자연스러운 질문 이
였지만, 갑작스러워서 입안의 커피가 기도와 식도를 모두 막아버리는
듯 했다.
어제 저녁 명은은 유난히 뜨거웠던 민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
고 싶은 마음에 제주도에서 돌아와 샤워기를 틀어 놓은 채 세수만 간
단히 하고 침대에 누웠었다. 손을 뻗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며 민재
의 손끝을 상상했다. 민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빠르게 반응
하고 있었다. 가슴을 쓸어 아래로 손을 옮겼을 때 충분히 젖어 들어
있었다.
민재를 느끼며, 민재의 거친 숨소리를 생각하며 명은은 처음으로
자위를 해보았다. 자위만으로도 이렇게 쾌감을 느낄 수 있다니... 명은
은 더욱더 자극적인 손놀림으로 흥분하고 있었다. 그때 서재 쪽에서
문소리가 들려 조용히 자는 척을 해야만 했었다.
승빈이 행여 젖어있는 자신을 느끼고 요구해 올까봐 걱정을 했었
지만 다행이 승빈은 등을 돌린 채 곧바로 잠을 청하는 듯 했다.
요즘 들어 승빈은 명은에 대한 욕구가 현격히 감소하고 있었다.
갑자기 병원 일이 많아져 피곤해서는 아니다. 연락이 두절된 세희에
대한 생각과 걱정 때문인지 단지 생각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명은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면이었다. 아이들마저 외가에서 지
내는 시간이 많은 집에서의 승빈과 명은은 그저 한집에 살고 있는 동
거인에 불과했다.
오늘 아침 승빈이 여느때 처럼 일어나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갔을 때. 샤워를 막 끝낸 명은이 화들짝 놀라며 수건을 집어들어 몸
을 가리는 듯 했다. 결혼 해 십년을 넘게 살아온 부부여서 샤워를 하
든 옷을 갈아입을 때 알몸을 보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명은
이였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아니요. 그냥 깜짝 놀래서 반사적으로 그러는 거죠."
"놀라긴... "
수증기에 쌓여 온몸에 물기를 흘리고 있는 명은은 아침을 맞아 바
짝 기상해있는 승빈의 남성을 깨우기 충분했다. 승빈은 소변부터 보
기로 했다.
밤새 채워놓은 방광을 비우자 시원함을 느끼며 몸이 더 가벼워지
는 듯했다. 욕실의 수증기가 꾸물꾸물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촉촉해져
있는 명은에게 막 손을 뻗으려는 순간 승빈은 주춤했다. 허리를 숙여
젖은 머리의 물기를 닦고있는 명은의 엉덩이에 만들어진 불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무심결에 '무슨 자국이야? 어디 부디 쳤었나?' 하고 물으려다 다가
서던 손을 거두었다. 작은 자국이 점점히 일정한 간격으로 모양을 만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국은 명은의 목과 어깨에도 나
있었다. 승빈의 방식이 아니였다.
승빈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찻물에 세수
를 했다. 화장실 벽면의 커다란 거울을 통해 문 앞에 준비해둔 속옷
을 입기 위해 허리 굽힌 명은의 엉덩이와 붉은 자국들이 더 크고 확
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민재는 눈을 감아버렸다.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생각이
한번 그쪽으로 접어들자 스스로 단정을 짓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
다. 요즘 들어 승빈이 강세희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아내를 너무 외
면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아내의 생활이
언제부터인가 종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대전에서 자고 오는 날도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언제나 전화로 이
유를 말해왔고 승빈은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였었다. 한쪽으로 생각
을 몰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승빈은 명은을 챙겨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올라오지?"
"네? 네. 별다른 일 없으니까 올라올거예요."
"그래. 운전조심하고."
"알았어요. 잘 다녀와요."
주말을 민재와 함께 보냈기 때문에 명은도 오늘은 제대로 올라 올
생각을 갖고있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네."
"응. 나야. 잘 잤어?"
"네. 잘 잤어요?
"오늘 저녁 같이하자. 7시 괜찮어?"
"네. 괜찮아요."
"그래 그럼 오피스텔에 있을께. 그리고 이번 주말에 일본 어때?"
"이번 주말에요?"
"그래. 하루빨리 가고 싶어서. 그래야 또 기회를 만들지. 하하"
"후후. 알았어요. 알아볼께요. 이따 만나서 이야기해요."
"그래. 그럼 조심해서 내려오고, 이따가 보자."
"네."
"명은아!"
"네?"
"음........ 사랑한다."
명은은 몸에 전율을 느꼈다. 가슴 밑바닥을 울리는 울림을 듣는
듯 했다.
"나도 사랑해요. 어젯밤 너무나 보고 싶었어요. 보고싶어요."
"그래 나도 보고싶어."
명은은 집안 일을 서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민재에게 가고 싶었다.
민재가 그리웠다. 열번 백번 민재의 사랑을 확인 받고 싶었다. 온통
민재에게 사로 잡혀 들 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명은이니? 애들하고 김 서방은 다 나갔니?"
"네."
"명은아 아버지가 건너오란다."
"왜요? 무슨일인데요?"
"와 보면 안다. 서둘러 지금 바로 와라."
무슨 일일까? 하는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집을 나섰다. 빗물
이 회색빛 아스팔트 주차장을 적시며 검은 색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
다.
"무슨 일이세요?"
현관문을 열어주던 어머니의 얼굴빛이 어두워져 있어서 어디가 아
프신가 하는 생각을 잠시 갖었는데 아버지의 얼굴빛에는 노기가 어려
있었다.
"너 대전에 뭐 하러 다니는 거냐?"
"네?"
아버지의 질문에 의아해 하고 있는 명은을 건네보며 어머니가 거들
었다.
"어제 대전에 결혼식이 있어 내려가는 길에 김 서방에게 열쇠를 받
아서 아버지랑 네 오피스텔인가 뭔가에 들렸었다."
명은은 순간적으로 세상이 암흑이 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