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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5일 근무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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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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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BY 이나래 2000-10-20

(내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수 있어요?)

(어디루 봐서 내가 그렇게 말을 잘 들을거 같애?)

(어휴, 우리 선배 언제 철들지? 말하는거 들으면 애라니깐)

(까불면 전화 끊는다.어서 주문이나 해봐, 아니, 주문하기전

에, 사실 나 혼자 생각 한거 있는데...)

(뭘까? 선배가 날위해, 날 기다리면서 뭘하려고 마음 먹었었

을까?)

(나, 성질 급해서 머리 기르는거 잘 못참거든, 근데, 너 다

시 서울 올라 올때 까지 나, 이 머리 안 자르고 계속 기를꺼

야. 이거, 대단한 각오 인거 알란가 몰라.)

(아! 햐! 으악!)

(왜~애?)

(우와! 나 원참. 나, 말못해, 못해. 못해.)

(왜, 뭣땜에 그래? 나 머리 기르면 이상할 꺼 같애?)

(그게 아니구,햐! 참. 나두 그 말 하려구 했다구요. 머리 길

러 보라구,안 되겠다, 우리 같이 살아야지. 이렇게 맘이 똑

같을 수가 있냐구요. 누가 들으면 믿을까요?)

(너, 또 까분거 알아?)

(못 들은척 넘어갈 수 없어요? 맘 먹은데로 되는 것두 아닌

데, 말두 못해봐요? )

(우리 전화 끊을까요? 더 하실 말씀 없음 그만 끊죠.)

(알았어요.알았어.씨... 내가 왜 선배 머리 길러 보라구 할

라 그랬는줄 모르죠? 선배 뒷모습, 짧은 머리 아래로 드러난

하얀 뒷목이 눈부시게 ??쳬求棅? 들어 봤어요? )

(아니. 처음 들었는데...거긴 뒷거을로도 잘 안보여. 근데,

??쳬?보이면, 앞으로 더 열심히 내 놔야지 ,머릴 기르면

안 보이잖아.)

(그러니까 기르라는 거죠.남들 못 보게. 나 다시 서울 갈 때

까지 1CM 도 자르면 안돼요.팍팍 길러갖구 덮구 다녀요.)

(듣구 보니깐, 아저씨, 무지 응큼하네.근데, 앞으로 다시 발

령 날 때까지 서울엔 한번도 안 올꺼야?)

(네. 안 가요. 가서 선배 보면 다시 내려 가기 싫어져서 사고

칠지도 몰라요.)

(그럼 나두 꾹꾹 참구 머리나 팍팍 기르면서 기다려야겠네.)

(그래요.꾹꾹...또, 팍팍.)

* * * * *


(나 지금 야근해요. 선배랑 같이 일 할 때 생각나서 걸었어

요. 여기, 진짜 일하기 힘들어요.)

(어떻하지? 내가 가서 도와 줄까?)

(그럴래요? 와요, 당장.)

(어떻게 가지? 비두 오는데.)

(잊었어요? 선배는 '새'라는걸? 날아와요. 지금 날아올 수있

지요?)

(나두 가구는 싶은데, 날개가 젖는건 싫거든. 대신, '비'가

돼서 니 옆에 있어줄께.힘들어두 참구 일 할꺼지?)

* * * *

그는 그렇게 늘 내 옆에 있었다.

길을 가다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30

년 뒤의 내 모습이 생각나서 짐을 들어다 드리다가 지각했는

데, 그것도 내 탓이라고 보상하라며 떼를 쓰기도 했고, 김밥을

먹는데 나처럼 떡볶기에 찍어 먹는 여자땜에 내 생각하느라 밥

종일 굶었다며, 김밥 싸서 소포로 보내 달라고 엉뚱한 주문을

해서 나를 안타깝게도 했다.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난, 미소를 짓고 있기도 했고,폭소가 터져

나와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 한적도 있었다.

그의 목소리로 아침을 여는 그 날은 하루종일을 구름위 천당

속에서 살았으며,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데 걸려오지 않는 날은

종일을 지옥속으로 쳐박히는 기분으로 살았다.

마치 난 그에게 조종 당하는 로봇처럼,...


행복이 찾아 왔으므로 난 그 행복속에 푹 파묻혀 지내야

당연한건데,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뻥 뚫어져 있었다. 완전히

내 것일 수 없는 사람, 영원히 함께 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사실만 각인 하지 않아도 된다면, 지금 찾아온 이 행복을 영

원히 붙들 수 있을텐데......그런데, 난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 때의 그 행복 모두를 그가 보냈고, 그로부터 생겼

다는 사실을 .....



눈 한번 내려 주지 않는 메마르고 건조한 겨울의 복판에

크리스마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도 안올라 와?)

(자꾸 바람 잡을꺼예요?)

(.....그래두...선물두 ..주구 받아야지.....)

(뭐? 갖구 싶은거 특별한거 있어요?)

(특별하지 않음 안 해주나?)

(선배, 몇 살이예요?)

(또 시작이야. 나 5 살이다.)

(그럼 크리스마스날 문에다 양말 걸어놓구 주무세요. 그럼

싼타할아버지가 선물 담아 줄꺼예요. 그러니깐 난 안 올라

가두 돼죠?)

(나 정말 많이 망가졌다, 너땜에. 유치해서 못 들어 주겠다.)

(몰랐어요? 선배 한 유치 하는거?)

(너, 거기 꼼짝말구 있어. 나 너 죽이러 간다.)

(얼마든지.난 몇년 전에 이미 어떤 한 여자한테 벌써 죽었

는걸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랑 놀음도 하고 있는 본인들은 마냥

즐겁고 신나서 꿈이라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면, 정말

영원히 깨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었다.


* * * *

눈은 안 내렸지만 그해 크리스마스에 눈 대신에, 눈보다

천만배쯤 반가운 선물이 내게 왔다.

그 였다. 그가 내게로 왔던 것이다.

"아, 뭐예요.왜, 왜 이렇게 말랐어요? 아팠어요? 힘 들었

었어요? 무슨 나 모르는 나쁜 일 있었어요?"

날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의 울 듯한 표정의 그가

쏟아놓은 첫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