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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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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별 앞에서


BY 로미 2000-10-03


23. 또다른 이별 앞에서

우리 세 식구,,,,,,

이렇게 말하면 천벌을 받겠지만, 우리 세 식구는 서울로 향해 떠

났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중간에 우리는 화양 계곡 쪽으로 발길

을 돌렸다. 속리산에서 가까운 그 곳, 너무나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그 곳은, 우리들의 신혼여행지나 다름없던 곳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르고 앙상한 가지들마다 이제 다가

올 겨울을 맨 몸으로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끝내 떨어

지지도 못하고 힘들게 매달려 있는 마른 이파리 하나를 떼서 손

에 쥐어 보았다. 바삭거리며 내 손안에서 흩어져 강물로 떠내려

갔다.


"야, 너무 이쁘다..."

나은이는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가보며 그렇게 말했다. 계곡은 그

때처럼 아름답고 눈부신 풍경이었다.

"저 집, 인형 집이야, 엄마?"

"아니, 예전에 어떤 할아버지가, 우암 송시열 선생님이라고,,,

음,그러니까 별장처럼 집을 짓고,,살던 곳이야.."

"저렇게 작은 집에서요?"

"옛날 사람들은 지금 보다 다 작았거든.."

나보다 빠르게 그는 딸에게 설명했다. 그 설명하는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 우스워 나는 쿡쿡 웃었다.

"아, 그렇구나,,근데 엄마 왜 웃어?"

"응, 아저씨가 웃겨서...."

"내가 왜 웃긴데?"

"아이한테 설명하는 게 그게 뭐예요?"

"왜? 얼마나 리얼하게 잘 설명한 건데? 나은이는 다 알아들었을

텐데,,그치?"

"네."

"참 나, 그래,,그 아버..."

나는 아차 하며, 말을 삼켰다. 나은이는 노느라고 내 말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란 말이..그

렇게 쉽게 내 입에서 나올 줄은 나도 몰랐다. 이렇게 쉽게 모든

게 풀어져 버리다니. 이제 돌아가면 우리는 다시 모르는 척 살아

야 하는데도. 아이를 하나 둔 부부가 한가로이 여행을 떠난 것처

럼 그렇게 쉽게, 그렇게 행복한 척 하며, 모든 걸 흉내내려 하

고 있다니....그도 내 얼굴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는지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그만 돌아가요. 너무 늦겠어요."

"엄마 조금만 더 놀다 가면 안돼?"

"그래. 오늘 돌아가지 않으면 꼭 안되는 것도 아니잖아?"

부녀는 나란히 서서 그렇게 말했다.

"나은아, 아저씨 기다리는 아줌마가 있단다. 집에 돌아가셔야

해."

나는 차를 향해 걸으며 바닥에 밟혀 부스러지고 마는 낙엽들

의 아우성을 들어야 했다.


"잠들었군 나은이."

동서울 톨게이트가 가까이 오자 그는 나은이를 돌아보며 말했

다. 그 말투에 배어있는 안타까운 사랑이 가슴 아팠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한강 고수부지로 나와 차를 세운 나는 그의 시

선을 무시한 채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저 손영인 이예요."

"네, 승준씨 찾았어요. 아마, 기억도 돌아온 거 같아요. 아니

요, 서울에 다 왔어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여기 천호대교 밑

의 고수부지예요.네 기다릴게요."

통화를 끝내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은정이한테 전화 한 거니?"

"그래요, 너무 늦은 전화지요. 며칠 전화 못한 건 당신이 알아

서 변명해요. 나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면 해요."

"그래, 이제 나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거니?"

그는 노여움을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당신이 선택한 거잖아요. 나 때문이라고 빠져나가려 하지 말아

요.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시려고 했을 때 당신은 도망 갔었잖아

요. 그러면서 나보고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지독하지 않아요?"

"나은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그렇지 않았을 꺼야."

"아니요, 나은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당신 어머니는, 나를, 수

술대에 눕히고, 아이를 갈기 갈기 찢어 죽였을 거예요. 아니면,

낳게 해서 입양시키겠다고 펄펄 뛰셨을 걸요."

"우리 어머니 그렇게 까지 독한 분은 아니다. 나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시건 사실이지만, 그건 나에 대해서 기대가 크셨기 때문이

었지 그렇게 까지 모진 분은 아니야.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었다

면 어머니는 아마도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 들이셨을 텐데..."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 결국 그 어머니의 아들인 것이다.

"결국 내 탓이군요. 하지만 잘 알아둬요. 아이를 가졌다면 낙태

를 시키거나 입양을 보내겠다고,,그렇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당

신 어머니니까요. 가서 한 번 물어보지 그래요. 아무튼 잘 잘못

따지고 그럴 일도 필요도 없어요. 나은이는, 내 아이예요. 부탁

한 대로 들어주겠다고 했었잖아요?"

"그래,,,그랬지...그럴 꺼야."


그녀의 차가, 정확히 말해 그녀를 태운 차가 고수부지로 들어서

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잘가요,,승준씨. 어쨌든 우리는 서로 미워하면 안돼요. 제발 저

기 저 여자, 아무 죄 없는 저 여자를 불행하게 하지는 말아요.

저 여자와 사이에서 나은 아이를 사랑하며 우리를 잊어 줘요.

나은이는 잘 키울 테니까 걱정 말고요."

우리가 차에서 내려서자, 그녀는 뛰듯이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

다.

"승준씨! 기억이 돌아 온 거예요? 그래요?"

"그래, 은정아, 그 동안 마음 고생 많았지? 미안해."

그들 부부의 해후를 눈물나게 감동적인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내가 못된 탓이라고, 나는 자신을 탓했다. 갑자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거 같았다.

"전 그만 갈게요. 그럼,,"

돌아 서는 나의 등에 대고 그의 아내는 흐느끼며 조그맣게 말했

다.

"영인씨 고마워요..정말,,,정말..."

"네, 그럼 안녕히..."

언젠가 저 모습이, 그럴 줄은 몰랐다고, 그렇게 속일 수가 있었

냐고, 악을 쓰고 덤비는 모습으로 바뀌는 건 아닐까..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돌렸다.

그의 눈이 우리를 태운 차를 ?고 있었지만, 제발 그가 현명하

게 처신해 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랬다.


집앞에 다다르자 나은이는 깨어났다.

"우리 딸 일어났네?"

나는 목소리 톤을 일부러 높이며 명랑하게 굴었다.

"아저씨는?"

"집에 가셨지."

"나은이한테 말도 안하고?"

"니가 자고 있어서,,,아저씨가 나은이 안녕, 잘가라 하셨어."

"엄마,나은이를 깨우지! 아저씨 미워, 그냥 가면 어떻게 해?"

소리내어 우는 딸을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