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억의 편린(片鱗)들
늦은 아침을 먹고 오랜만에 요위를 뒹굴며 나은이와 장난을 치
고 있었다. 남은 남인 것인지 밤새도록 울고 싸우는 소리가 요란
했던 위층 모녀가 걱정이 안 되었던 건 아니지만, 어차피 건너
야 할 강이였고, 누구도 끼여들 수 없는 문제였다. 더구나 나는
제 삼자가 아닌가. 누구 편을 들어도 한 쪽에게 욕을 먹을 수밖
에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나은이와 느긋하고 편안한
시간을 지내고 싶었다. 닥치는 일은 닥쳐오는 대로 해결하면 되
는 거였다.
"나은이는 어디 가고 싶어?"
나는 딸애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응, 서울."
"서울?"
"응. 서울에 가고 싶어."
"왜?"
"할머니도 못 보고 왔잖아 저번에..."
"이모할머니 바쁘시니까 그렇지..."
"나은이 서울 가면 안돼?"
"아마, 할머니 편찮으셔서 병원에 가셨을 꺼야. 우리 오늘 피자
먹으러 갈래? 놀이 공원에도 가고?"
"신애 언니랑 같이?"
"아니 엄마랑 둘이서...신애언니두 아마 아플 꺼야."
"그럼 엄마랑 나랑 둘이서 가야돼?"
"엄마랑 둘이 가는 거 싫어?"
"아니, 엄마랑 둘이서만 다니면 애들이 엄마랑 나랑 둘이 만 사
는 줄 알까봐 그렇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는 몸을 일으키고 제대로 앉아서 나은
이를 똑바로 앉힌 다음 다시 물었다.
"나은아 엄마랑 둘이 만 사는 게 챙피해?"
"아니, 다래도 그렇고, 수지도 그렇고 나보고 엄마랑 둘이서만
사느냐고 물어서 아줌마랑 언니두 같이 산다고 했거든. 군대간
오빠두 있고...그런데 엄마랑 나랑 둘이서만 다니면 우리 둘이
사는 줄 알잖아?"
"너는 엄마랑 둘이서만 살잖아...친구들이 물으면 그렇게 대답해
야지. 정직하게."
"다른 애들은 아빠도 있고 할머니도 있잖아."
"너한테는 엄마가 있잖아. 엄마는 너보다 더 어?퓽?적부터 엄마
도 없었어."
"그럼 엄마는 되게 불쌍한 애였어?"
내 말에 딸애는 눈물이 그렁해 가지고 다시 물었다. 어느 동화책
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불쌍하지는 않았지. 이모할머니 댁에서 컸으니까. 하지만 엄마
가 없어서 많이 울었었어. 엄마는 나은이 옆에 항상 같이 있으니
까 나은이는 행복한 거야. 엄마가 나은이 너무 너무 사랑하는
거 알지?"
"엄마~ 애들한테 엄마가 있으니까 나두 행복한 애라고 말할
께...."
"그래. 나은아. 나은이는 아빠가 없는 게 아니야, 아빠도 나은
이 보고 싶어하셨지만 먼저 저기 하늘나라에 가신 거잖아. 그건
나은이 잘못이 아니야. 나은이가 이쁘게 잘 크면 아빠가 저기 하
늘에서 보시고 우리 나은이, 정말 이쁘구나 하실꺼야."
나이보다 조숙하다고 해도 아직 여섯 살 짜리 꼬마인 나은이가
얼마나 더 오래 잘 견뎌 줄 수 있을까. 딸을 안고 볼을 부비면서
도 나는 앞날이 먹장구름처럼 어두워져 옴을 느꼈다. 좀 더 커
서 더 많은 것을 물을 나이가 되면 왜 나를 낳았느냐고 나에게
악을 써 댈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그래도
너를 포기 할 수는 없었다고 그렇게 말해야 할지 나는 암담한 심
정이 되었다.
결국 나은이는 에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고 금방 밝
은 얼굴이 되어 영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무거워서
머리가 멍할 지경이었다. 나은이의 아빠, 이 세상에 딸이 태어
나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그는, 아마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세상에 태어난 딸을 끔직 하게 예뻐했을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생각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 썼던 날도 있었고,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어머니가 지옥의 사자처럼 같이 따라
붙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화상의 흔적처럼 기억했었다.
하지만 나은이의 얼굴 표정 하나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잠든
나은이의 옆모습은 여자로 환생한 그를 보는 것 같기도 했었고,
그가 만들어 내던 갖가지 표정을 나은이는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었다. 졸리면 머리를 긁적인다거나, 웃을 때 한 쪽 볼에만 보
조개가 패는 것, 파를 죽어도 먹지 않는 식습관까지... 나는 유
전자의 위대함을 알 것 같았다. 사람에게 환생이란 게 정말 있다
면 그건 자식을 통해서가 아닐까. 내 어린 시절의 사진을 나은이
와 비교해 보면 흑백과 칼라라는 차이 뿐, 구분 할 수 없다고 다
들 놀라워했다. 그런데도 나은이의 어딘가 에는 그가 숨어서 살
아있었다.
나는 그를 가지기를 포기하는 대신 그의 어머니처럼 나의 아이
를 선택했었다. 처음 인사를 하러 갔던 날부터 아주 차갑고 냉랭
했던 그의 어머니는 결국 허락도 없이 살림을 차렸던 우리에게
보란 듯이 자살을 시도했었다. 나는 그 끔찍한 모정에 소름이 돋
았었다. 자식이란 그런 걸까. 그래서 내 어머니도 나를 살리느라
고 그렇게 부서지듯 죽어 간 걸까. 내 엄마도 살아 있다면 내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소망을 강요했을까...그래도 노력해보자고
헤어질 수 없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벌써 그도 어머니와
내 사이에서 지쳐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선택할 수 있는 건 나였다. 헤어지려고 결심한 무렵 나
는 아기가 생겼음을 눈치챘지만 확인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리
고 생각해 봤었다. 그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가를...
나는 그의 어머니를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섬길 마음이 손톱만
큼도 들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더 증오했었다. 그러면서 그
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증오하는 여자의 아들을 사랑한
다고 할 수 있는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이미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그에게도 뜨악해졌고, 그는 내가 봉투를 받아 들고 떠날꺼
라고 약속한 걸 알고는 내게 달려왔었다.
-영인아, 너 정말 그 돈을 받았단 말이야?
-응,,그랬어
-너 어떻게....
-그냥 헤어지는 것보다야 덜 억울하잖아.어쨌든 처녀 신세를 망
친건데...
-뭐, 뭐라고?
나는 작은 가방에 내 옷가지를 싸며 담담히 말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가난한 집 아들이라고 그렇게 말했을 때, 비슷
한 처지라서 다행이구나 했었지. 그러나 나는 당신이 거짓말 한
걸 알고 나서 오히려 기뻤어. 혹시 신데렐라가 되는 건 아닌가
하고. 그런데 현실에서는 신데렐라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
어. 이제 열 두 시 종이 치고 정신이 돌아 온 거지. 유리구두
는 왕비님이 던져서 깨버리고...그래도 다행이잖아. 다시 누더기
를 걸치게 생겼는데."
"너 너 미쳤구나!"
나를 잡아 흔들며 그는 소리쳤다.
"왜 이래? 내가 이러기를 바란 거 아니였어?"
"영인아!"
"그럼 왜 집에 안 들어 온 건데?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 아무 데
도 갈 데가 없어서 아니였어? 이제 그만하면 됐어. 다시 왕궁으
로 돌아가 버려."
"영인아, 우리 이렇게 헤어지면 안돼는 거야. 난 널 포기 할 수
없어. 어떻게 여기 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노력해보자..응?"
"무슨 노력? 나는 이제 당신 어머니가 징그러워."
그 말끝에 철썩하는 소리가 났다. 그와 이별을 고하는 소리였다.
어쩌면 나는,
아기가 있음을 감지하면서 그와 헤어지기가 더 수월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를 내 안에 담고 떠나는 길이었으니까....
영화관에서 나오는 데 핸드폰이 울렸다.
"네, 손영인입니다."
"언니, 나 신애."
"어, 미안해 들여다 보지도 못하고..언니는 좀 어떻시니?"
"머리 싸매고 누워 계시지,뭐.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
거야. 하지만 난 괜찮아, 각오한거니까. 참 그런데 언니.
이모님이 찾아 오셨어."
"이모? 우리 이모?"
"응, 지금 언니네 방 문 잠겨서 내가 스페어 키로 열어 드렸는
데. 바꿔 드릴까?"
"아니, 금방 간다고 전해 줘."
"알았어 언니."
"나은아, 할머니 오셨대.."
나는 핸드폰을 접어 넣으며 나은이에게 말했다.
"어? 서울 할머니? 정말?"
"응...할머니가 나은이 보고 싶어서 오셨대. 빨리 가보자."
어째서 요즘은 이렇게 복잡한 일이 한꺼번에 생겨나는 걸까...나
는 머리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