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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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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진짜달팽이 2000-07-26


그날 이후 그녀와의 은밀한 만남은 절묘하게 이어졌다. 강태식 사장과 형님의 눈을 피해

그리고 다른 아가씨들의 호기심을 피해다니는 우리들의 만남은 마치 바다 속을 유영하는

작은 물고기들의 춤사위와도 같았다.

우린 후미진 여관의 습진 이불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고

서로의 역사에 대해서도 절대로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원래 말이 없는 그녀이기도 했고

원래 말주변이 없는 나이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만남은 상상해보지도 못했지만 뜻밖에도

내게 천국보다 편안한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엄마의 뱃속에서

누워 있을 때가 아마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하거나 고민할 만한 미래에 대한

근거도 없었고 아파하거나 그리워해야 할 과거도 없는 상태. 그 상태에서 서로를 느끼고

나누는 행위는 늘 깊은 잠으로 빠져들게 했다.

우리들의 만남은 계절이 두 번 바뀌도록 계속되었고 밤 시간과 낮 시간은 세상과 바다 속을

넘나드는 아득한 시간들이었다.



"야, 너 요새 킨스키랑 왜 그렇게 자주 붙어댕기는겨?"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이 매우 의심쩍은 눈으로 물어왔다.

"부... 부 붙어댕기긴유... 마담이 바... 바 밖에 나갈 땐 지가 따라 붙어야 되는 게

지 임무잖여유. 하따 지두 귀찮여 죽것슈. 뭔 놈의 목욕을 맨날 댕긴대유"

"너 말여, 나랑 고향이 같으니께 충고하는 건디 우리 사장님은 사내 연애하는 인간들을

존나 혐오하신단 말여. 잘 혀. 괜시리 엄한 사랑 놀음 하다 들키믄 여서 살아선 못 나가니께"

"아... 암유..."

뜨거운 땀 줄기 하나가 길게 등을 타고 내려왔다.

"알았음 됐고, 가서 킨스키 보고 지금 사장님 방으로 가라 그려."

"사장님 방으루유?"

"아, 그려. 뭘 그렇게 쳐다봐? 어디 한두번이여?"

가끔 그녀는 강태식 사장에게 공개적으로 은밀하게 불려다녔다. 내가 볼 땐 윤희나

다른 아가씨들이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반반한데 강사장은 이 곳에 있는 아가씨들 중

유독 그녀만 찾았다. 강사장의 방으로 갈 때 그녀는 꼭 체면에 걸린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어갔다. 죽은 사람과도 같은 그녀의 표정은 나만이 아는 그녀의 표정이었다. 어떤 일에도

그녀는 절대로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만 아는 그녀의 표정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하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표현이었다.

그녀의 방으로 가서 그 말을 전했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는데 말 없이 엎드려서 만화책을

보기만 하던 그녀가 나를 불렀다.

"성배야. 우리 도망갈까?"

나는 뜻밖의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무엇인가를 함께 계획하거나 고민해본 적도 없는

우리였는데 그때 그녀는 목숨을 던지자 라는 제의를 마치 '우리 영화 한 편 보러갈까?'라고

묻듯이 말했던 것이다. 여전히 엎드려 만화책을 보고 있던 채로.

"... 강사장 성내기 전에 빨랑 가봐..."

"아버지가 보고 싶어."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아버지가 있긴 있었나 보다. 그녀 입에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는 문득 불안했었다. 다시 온전히 바다 속을 거닐어볼 수 있을까...

다음 날 형님이 홀에 있는 나를 불렀다. 홀과 이어져 있는 사장의 집에서 아가씨들과

나 같은 문빵들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다른 고참 문빵과 형님이

작은 방 앞에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치며 거친 숨을 고르고 서있었다.

"무슨 일이여유?"

"어, 너 잘 왔다. 오늘은 니가 해라."

"뭘유?"

"아, 뭐긴. 보면 몰러? 아 씨발년들이 말을 안듣잖여. 다방에서 꼴난 월급두 못 받구

일하는 것덜 데려다 더 좋은 데서 일하게 해줄라고 했는디 저것들이 끝까지 버팅기잖여."

고참들에게서 전에 얼핏 들은 적은 있었는데 설마 했던 일이었다. 다방이나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10대 아가씨들을 마담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이 곳으로 데리고 오는 일이 있다고,

그러면 뻣뻣한 배추잎을 노긋노긋하게 저려 놓듯이 처음에 그들의 반항기를 빼놓고 감시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안 그래도 자기들이 스스로

찾아 들어오기 때문에 그런 일은 옛날처럼 흔하지 않다고 들었다.

"야, 뭐혀? 빨랑 안들어가, 새꺄?"

머뭇거리는 나의 복부를 향해 두세 차례의 가격이 들어왔다. 나는 나의 그 평화로운 바다 속에

온몸이 묶인 채로 깊이깊이 잠수해 들어가고 있었다.

고참과 함께 방에 집어넣어졌을 때 두 명의 어린 아가씨들의 시퍼렇게 멍든 얼굴과

잔뜩 겁에 질려 진동 삐삐처럼 흔들리는 눈 때문에 나는 너무 겁이 났다.

그러나 겁이 많은 인간들은 어떤 짓이든 하는 법이었다. 그녀와 나의 평화로운 바다 속은

이제 더 이상 평화로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말하던 내가 누군지 모르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