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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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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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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BY 진짜달팽이 2000-07-04


가난한 건달의 딸로 태어난 나는 스물 일곱의 이 화창한 봄날까지도 여전히 가난하다.

건달은 아니지만 현재 직업이 없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난 아버지를

감히 건달이라고 부르는 것에 잠깐의 찰나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내게 보여준

모습은 늘 책상 앞에 앉은 뒷모습이었다. 학교에 갈 때나 돌아왔을 때나 그는 항상

그 자리에서 책을 보거나 엎드려 자고 있거나...... 다른 아버지들처럼 아침에 일터로

향하는 모습도 못 보았고 하다못해 무더위로 인해 땀을 흘리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엄마가 하시는 조그만 미용실에 딸린 방 한 칸이 우리 네 가족의 유일한 쉼터였으나

그 곳에서 엄만 시 쓴다는 아버지를 이유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게 했다. 아, 아버지가

일을 한 적도 있기는 했다. 동네에서 가까운 강관 회사에 다닌 적도 있었고 이 년을

버티지 못한 수입품 가게와 당구장을 경영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직까지도

엄마가 빚에 쫓기는 이유가 그 때 얻은 빚 때문인 것도 같다. 그렇게 엄마와 나와 동생의

인생을 야금야금 좀먹던 아버지는 서서히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종국엔

그가....... 그를 죽였다. 그가 우리 가족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자선이었다.


오늘도 늦을 거니? 네 애비 제삿날인 거 뻔히 알면서 번번히 열 두시 넘겨 들어오는

이유가 뭐냐? 6년을 지치지 않고 매년 오늘 아침이면 엄마는 똑같은 말로 내게 지청구를

준다. 아마 엄만 작년 오늘에도 똑같은 말로 내게 화를 냈다는 걸 기억 못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죄숑함다."

생각을 끊고 누군가 내 옆자리를 비집고 '퍽' 주저앉는다. '퍽' 하고

신내 섞인 알코올 냄새가 같이 내 코를 친다. 코가 얼얼해진다. 만취한 여자는

청잠바에 청치마를 입고 있었다. 풀어진 자세로 앉은 그녀의 쫄티 밑으로

흰 뱃살 덩어리가 타원형의 입체 도형으로 불거져 나왔다. 원형. 건축에서 원형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도형이다. 원은 상자형과 달리 중심에서 완벽하게 일치되는

좌우대칭 관계의 점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외부에 대한 극심한 배타를 심어주는 도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완벽한 내부 질서와 위계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원의

중심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간 자리에 있는 점은 어딘가 거북스럽고 부조화스러운 느낌을

주고 중심에 있는 점은 그야말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늘 없었다. 그 자리는 늘 공석이었고, 그 공석 주변을

떠돌아다니며 자폭할 때만 기다리는 인공위성이 있었을 뿐이다. 원에 최대한의 변화를

가미한 것이 타원형인데 그걸 누군가 잡아 늘린 것인지, 아니면 양방향에서 오는 압력에

눌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문득 내 옆의 타원형을 그 건너편 남자와 내가 함께 힘을

가하면 원형으로 돌아올 것 같은 충동이 인다. 하지만 싫다. 원은 재미없다. 우리 가족들

모습엔 그 원과 같이 세상과 조화롭지 못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던 아버지가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