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숨막히게 그리운 날들이 흘러갔다.
나는 외출조차 삼가며,숨어 지냈다.
무심히 그의 병원 앞을 스쳐 지나갈 여유가 아직은 내게 없었
다. 참지 못하고 들어가서 진료중인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싶어질까봐 두려웠다.
무심한 일상이 흐르는 동안,시간이 그렇게 잊혀지는 혜택을 내
게 주길 바라며 그림자처럼 떠돌았다.
남편은 매일같이 약 봉투를 잘라 쏟아내는 나를 힘들어했지만 되
도록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거 같았다.
꼭 보는 데서 그런 건 아니지만,주의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참으로 미안해 해야 마땅한데도 괜한 신경질을 부
리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내게 정말 힘이 드는 건 남편하고 자는 일이었다.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으려는 갑작스런 내 태도에 남편은 불쾌해
하면서도 아이를 갖는 문제로 날카로워서 그렇다고 판단했는지
참아주는 눈치였지만,난 웬지 남편하고 자는 일이 그렇게 쓸쓸
하게 느껴 질수가 없었다.
결혼 후에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아왔지만,마음에서 원하지 않아
도 남편이 원할 땐 응해주었고,그것이 그렇게 쓸쓸한 일은 아니
었었다.
하지만,나는 마치 남편이 애인이 있는 날 강간하려 덤비는 치한
인 것처럼 펄쩍 뛰며 경계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사이라도 다른 사랑이 생기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날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 날 이후 내게 전화하지 않
았다.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러는 나를 질책하며 견디었
다.
볕 좋은 어느 날 오후,베란다에서 바라다 보니 무덤 옆 밭에 할
머니가 배추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의 매일이다 시
피 보는 광경이었는데도 그 날 새삼스레 눈에 들어 온 것은 할머
니가 그 무덤을 이리저리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덤위
에 자란 풀을 뽑는 것도 아니었고,아이 머릴 쓰다듬 듯이 이리
저리 매만지고 있었다.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유치원에서 돌아 온 새미를 데리고 그 밭가로 산책을 나갔다.
할머니 곁에 다가가 무언가 얘길 나눠보고 싶었다.
제주도 사투리가 심한 할머님들의 말은 조금 밖엔 알아듣지 못하
면서도 나는 용감하게 다가갔다. 새미는 밭의 흙을 만지며 조아
라 뛰어 다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흘깃 할머니는 나를 쳐다봤다.
"이 앞 빌라에 사는 애기 어망이라?"
"절 어떻게 아세요?"
"애기가 고왕 기억이 남쪄.가끔 여기 나왕으네 노는거 ?f주게"
"잘도 요망지게 생겨쪄"
"별로 그렇게 똘똘하지도 않은데요,예쁘게 봐 주셨다니 고맙습
니다. 근데 할머니,이 밭 주인이세요?"
"응,이 아핀 다 우리 밭이주"
"이 앞이 다요? 할머니는 물질 안하셨나봐요?"
"무사? 절멍 물질 안핸 여편이 어디 이서?"
"그러셨어요?"
"이젠 너무 나이들엉 심도 어성 안햄신디 젊었을 땐 물질 허멍
새끼들 돌바쭈개,이 밭들도 모다노앙 낫쭈"
"힘 많이 드셨겠어요"
"제주 어멍드른 다 경해명 살아서"
"그렇군요,근데 할머니 이 산소 할아버지 세요?"
할머니는 슬쩍 무덤을 쳐다 봤다.
"응 우리 하르방이주"
"매일 이렇게 보시니 좋으세요?"
"조키는 무신거시 조아? 살앙 이실젠 징그럽게 속만 써겨쭈. 하
기사 죽엉 이추룩 이시난 속도 안써경 조은게?"
할머니는 조금 웃었다. 다 알아 듣진 못해도, 그 맘은 알 것 같
았다.
"근데요,무슨 속을 그렇게 썩이셨어요?"
"돈 벌이는 코사하고 이신 돈 가져강 노름에 계집질에 다 써그
냉 육지로 여자엉 도망 간적도 있주"
"어,그런데도 이혼 안하셨어요?"
할머니는 계속 쉬지 않고 배추를 솎아내고 계셨지만 내 그 말에
살짝 나를 흘겨 보셨다.
"요즘 절문것들이나 경허주,우리 땐 자식 새끼들 키우멍 그냥
살아서. 무신 이혼을 해여? 애들 키우명 살다 보문 다 돌아오
주,우린 육지 여자들 하곤 틀리주게"
나는 조금 머쓱해 졌다.
"그러셨구나.할머니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요새 절문 어멍들,툭하면 이혼햄댕 허곡 지 속으로 난 새끼들
드러쌍 나가기도 해는디.좀 참앙 살문 될 것도 경 쉽게 갈라서
주. 애기 어멍이랑 경 허지 말아,알아서?"
"네에."
나는 아주 순하게 웃으며 네- 라고 대답했다.
"웃지말앙.자, 이거 노물 약 안해그냉 그냥 키운거난 가져당 겉
절이 해 먹으라."
"어머나 이렇게나 많이요? 고맙습니다 할머니,잘 먹을께요."
여기저기 뛰어 다니는 새미를 불렀다.
"새미야 그만 집에 가자"
"그럼 할머니 저희 먼저 들어 갈께요."
"갑서 그럼. 애기야,어멍핸디 이기 맛조케 무쳐 달랭해영 먹으
라"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새미는 그래도 웃으며,그냥
네-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계속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평생을 다른 곳은 곁눈질 한 번 안하고 살아오셨을 저 할머니는
지금의 나를 안다면 뭐라고 하실까. 그렇게 속만 썩이고 죽은
남편의 무덤을 어루만지는 그 심정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나
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먼 훗날에 난 새미아빠에게 그런 아내
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런 아름다
운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남편을 더이상 외롭게 하지 않아야 한
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저녁에 돌아온 남편에게 난 말했다.
"나 새미 데리고 서울로 올라 가고 싶어."
"그럼 나는?"
"현장 근처 숙소에 머물든지 이 집에 그냥 혼자 있든지. 이제 1
년 남짓 밖엔 안 남았잖아. 나 답답하고 여기 더 못있겠어. 서
울로 가서 다시 시작해 보고 싶어."
"뭘 다시 시작한단거야?"
"당신이 이해해준다면,새미는 이미 유치원에도 다니고 있고,좀
있음 학교도 가니까 난 새로 일을 하고 싶어."
"무슨 일을 해 당신이?"
"공부를 좀 더 해서 학원에서 아이들이라도 가르쳐 보고 싶어."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이대로 여기 눌러 앉아서 이렇게 살 순 없어. 당신도 내가 황
폐해져 가는 걸 보고 있잖아. 1년만 참아줘. 당신과 나,좀 떨어
져서 살다보면 우리 좀 더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같이 있어도 이해 못하는데 뭘. 떨어져 있으면서 어떻게 이핼
하냐?"
"좀 떨어져 있다보면 당신이 그리워 질꺼구,다시 시작하는 기분
이 될꺼같애."
"생각해 보자."
"고마워 여보."
"아직 결론 내린 거 아니야."
"아니,이런 날 참아줘서 고맙다구"
남편은 말없이 신문을 들여다 봤다.
진심으로 이런 날 참아주는 남편이 고마워졌다.
그리고, 이제야,조금은 길이 보이는 거 같았다.
벗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길인 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날,
견디기만 할 수는 없는 거였다.
그렇게 떠나서라도 벗어나야 했다. 새로운 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