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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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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밑으로만 흐르는 물처럼.


BY 로미 2000-07-09

새미는 아빠한테 착 달라붙은 채로 날 멀건히 바라다 봤다.

이틀이나 떨어져 있던 엄마였는데 웬일인지 반갑게 달려들지 않

았다.

"새미,엄마랑 집에 가야지. 아빤 빨리 회사로 가야 돼."

남편은 안 떨어지려는 어린 딸을 내게 떼어 주며 말했다.

늦었다며 먼저 택시를 타고 남편이 공항을 떠나자,딸애를 데리

고 쥬스를 마시러 공항 2층의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집에 가기 전에 뭣 땜에 새미가 그러는지 알고 싶어졌고,아일

달래고 싶었다.

"새미야,왜 그래? 엄마 보고 싶지 않았어?"

나는 새미의 반응이 서운해서 물었다.

"아니,보고 싶었어."

딸애는 눈물이 그렁해 가지고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엄마한테 화났어?"

"응..."

"왜?"

"엄마,날 왜 할머니한테 보냈어?"

"엄마가 보낸 게 아니고,할머니가 데려가신 거잖아."

"엄마가,새미 싫어서 보낸 거 아니야?"

"엄마는 우리 새미 없음 못사는데? 그러니까 아빠보고 새미 빨

리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정말?"

"그럼~ 엄만 정말 새미가 너무 보고 싶었어."

"다신 새미 할머니 한테 안 보내?"

"엄마랑 같이 가면 되지...할머니도 새미를 사랑하셔서 새미를

옆에 두고 오래 보고 싶으셨던 거야."

"엄마,아빠가 있는 데두,밤에 엄마 생각 나서 울었어."

어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안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

다. 새미는 마음이 풀린 듯 주스를 열심히 빨아 마시고,햄버거

까지 먹고 싶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속상해서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을 딸을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딸애가 엄마가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한 그 시

간에 엄마란 사람은 다른 사랑에 빠져 딸을 잊고 있었다.

두고 두고 딸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 온 새미는 단잠에 빠졌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오

느라 잠을 설쳤던 것 같았다. 집에 돌아 온 안도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딸애에게 훗날 엄마의 지금 심정을 얘기한다면 이해

할 수 있을까.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맘을 이해해 줄 날이 올수

있을까. 잠든 딸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만 울려도 깜짝 놀라는 내가 싫었다.

시계를 쳐다 봤더니 12시 였다.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

시 망설여졌지만,수화기를 들었다. 시어머니였다.

"네,어머니.저예요."

"도착했으면 전화를 줘야지.걱정했다."

"그러셨어요,전 새미아빠가 전화 드린 줄 알았어요."

"직장에 간 사람이 사적인 전화를 맘대로 할 수 있겠냐?"

"죄송해요,제가 못 챙겼네요."

"내일 쯤 약이 도착 할 꺼다."

"무슨 약이요?"

"네 약이다. 몸이 너무 부실하니 애가 안 들어서지. 정성껏 먹

어라. 알았지?"

"네"

"그럼 끊자."

"안녕히 계세요."

아들을 향한 짐념. 굳이 그래야만 하는 걸까.

아들을 못 나아서 이혼해야 한다면 그러고도 싶다. 새미만 내

게 보내 준다면...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네~"

"접니다."

"네..."

"새민 왔습니까?"

"네."

"내일 점심시간에 잠깐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차를 가지고,주유소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12시 20분까지

나오세요. 할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어제 다 말씀 드렸잖아요..."

"전 아직 다 못했습니다. 기다리죠."

어쩌면 그래도 그의 전화를 기다렸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이 쯤에서 그냥 포기해주길 바랬다. 그래야 나도 힘들지

만 잊어갈 수 있을 터 였는데.

공항에서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 보기가 힘들었었다. 앞으

로도 한 동안 그럴지도 몰랐다. 그런 채 지낼 날들이 너무나 무

서워졌다.

저녁에 돌아 온 남편은 새미가 활기를 되찾은 모습을 보고 신기

하다는 듯 말했다.

"저 녀석,그렇게 비위를 맞춰 주는 데도 부어 있더니,집이 좋

긴 한가?"

"당신,새미가 뭐라고 한 줄 알아?"

"뭐?O는데?"

"엄마가 절 보기 싫어서 보낸 거라고 생각했대."

"뭐라고?"

남편은 웃음을 터뜨렸다.

"참 엉뚱한 데가 있네 우리 새미.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아무리 어려도 자길 왜 데려가려 하는 지 감으로 안거지."

"무슨 소리야?"

"어머니가 새미를 왜 데려 가시려고 한 줄 정말 몰라?"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냥 무시하면 안돼?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거지,뭘 그래?"

"당연하다고?"

"노인네가 그러시나보다 하면 될껄,뭘 그렇게 예민하게 그래?내

가 아들 타령하는 것도 아니고,새미 하나로 만족해. 만약 더 생

긴다면 그리고 그게 아들이라면 좋겠지만,그건 어쩔 수 없는 거

잖아.그냥 그렇게 생각해."

"난 그럴 수 없어. 어머니가 내일 약을 보내시겠다고 하더군.당

신이 먹지 그래? 왜 나만 먹어야 하지?아인 나 혼자 만들어? 새

밀 낳았는데 내가 불임인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말해 두겠는

데 난 이제 아이 안 낳을 꺼야. 그냥 생기진 절대로 않을꺼야.

그런 줄 알아."

"어째서? 새미에게 동생이 하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건 오히려

당신이잖아."

"맘이 바뀌었어. 난 새미 하나로 만족하고 살기로 했어. 당신

이 동의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너무 예민해져 있군, 당신.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자 우리."

"나중이라고 달라지진 않을꺼야."


다음 날 아침,새미를 유치원차에 태워 보내고 집안 정리를 했

다. 솔규엄마가 차를 마시러 오고 싶어 했지만,외출한다고 말해

버렸다. 그 말을 하면서,그래 나가고 싶어하는구나,하고 생각했

다. 나가기로 내 자신이 결정한 걸 그렇게 말해버린 거구나,하

고.

베이지색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짙지않게 화장도 했다. 이러

는 내가 너무나 싫었지만,그가 하고 싶단 말이 뭔지도 궁금해

졌다. 지난 며칠 사이가 십년을 지난 것 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주유소 앞에서 그의 차에 올라 타면서,혹시 아는 사람을 만날

까 주위를 살폈다.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이 서글펐

다.

그는 피로해 보였다. 언제나 말끔했던 수염도 단 이틀 사이 꺼

뭇하게 자라 있었고,눈도 충혈 돼 보였다.

"조금 나갔다 다시 들어오지요."

차를 출발 시키며 그가 말했다. 점심시간은 1시 반 까지 였으므

로,한 시간 남짓 시간이 있었다.

"점심,드셨어요?'

"날 걱정해 주는 거요? 당신?"

이틀 사이에 그의 말투는 달라져 있었다. 결코 기분 나쁘지 않

은 변화였다.

"네,피로해 보여서요."

아무 내색없이 대답했다.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날 걱정한다고?"

"이러지 마세요,선생님."

"난 당신 선생이 아니야."

"그래요,준수씨.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건 당신 혼자 내린 결정이지. 내 결정은 아니었소"

"그래서 뭘 어쩌실 껀데요,원하시는 게 뭔데요?"

지쳐서 내가 대답했다.

"우리가 결국은 끝이 보이는 사랑을 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시작하다 중간에 그만 두는 거나,할 수 있는 날까지 사

랑하는 거나 뭐가 다르단 거요?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여길 뜨

게 되면 그 게 끝이 될텐데.당신 말처럼,나머지 생을 살아가면

서 가슴에 간직할 추억이,그런 당신과의 시간이 내겐 필요하단

말이요."

"제가 떠나야 하겠군요."

"당신은 정말 나쁜 여자군."

"결국은 끝이 뻔한 얘기를 돌려서 쓴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우

리도 남들의 눈에는 흔하디 흔한 불륜일 뿐이예요."

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안아, 가슴에 갖다 대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당신이 있는데,견디기가 어려울 꺼

같소 난."

"전 견딜 꺼예요. 아마,그리워하다 어떤 날 당신에게 달려 가고

싶을지도 모르죠.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참고 또 참아서라도 이런 만남은 하지 말아야 해요. 이

제 더이상 제게 오지 마세요. 전화 하셔도 이제 나오지 않을 꺼

예요."

고개를 들어,그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서로가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남은 날을 생각한다면, 새미

를 생각한다면,그럴 수 없었다.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다 봤다. 그 역시 힘들어 하는 게 안스러

웠다.

"혹시요,다음 생이 있다면요,그 땐 절 기억해 주세요."

"그런거 난 믿지 않소."

나는 쓰게 웃었다.

"저도 사실은 안 믿어요. 그렇게라도,위안받고 싶어서요."


집 가까이에서 차를 내리고 걸어 돌아오는 길 옆에 흐르지 않는

개울이 보였다.물 한점 흐르지 않는 개울이나 계곡이 제주엔 많

았다. 아니 거의 다 그?O다. 그렇지만 그 물들은 땅 밑으로 다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그러리라, 마음 저 밑으로만 흘

러가리라,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