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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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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슬픔


BY 로미 2000-07-08

사라봉의 낙조는 아름다웠다.

차를 세우고 나니,유리창 전면으로 해가 지는 게 보였다.

부두엔 서서히 불들이 켜지면서 아름다운 밤바다를 비추고 있었

다. 바다에 이런 풍경도 있었구나,이렇게 가슴 저미게 아름다

운 노을도 있었구나- 아무 말 없이 해가 지는 걸 지켜 보고 있자

니,눈 앞이 흐려져 왔다.

"신영씨,내 손을 잡아요."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난 잡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잡아봐요. 신영씨랑 이렇게 손을 마주 잡고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 싶어서 그래요."

머뭇거리자,그가 손을 잡았다.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손을 마주 잡고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 봤다.

그저 그렇게 해가 완전히 지고,밤이 될 때 까지 말 없이 앉아

서 배들이 들고 나며 비추는 불빛들을 바라다 봤다.


"그만 가죠. 이제"

손을 빼면서 내가 말했다.

"그래야 되겠죠? 배 고프지 않아요? 가다가 뭐 요기라도 좀 할

까요?"

"아니예요. 그냥 이대로 집에 가고 싶어요."

"난 신영씨랑 저녁 먹고 차도 마시고 헤어지고 싶은데요."

"저 너무 힘이 들어요. 머리도 아프고. 맘이 벅차기도 하고,슬

프기도 하고.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는 날 바라다 봤다.

"신영씨,날 사랑하는 군요"

그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지려 했다.

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그의 눈을 바라다 봤다.

"선생님,가진 모든 걸 다 두고 절 선택할 만큼의 사랑이 아니라

면,그냥 절 보내 주세요."

"무슨 말입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 겠지요. 남편과 새미-다 두고도 선생님을 선

택 할 만큼의 사랑은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건... 우리가 책임 져야할 가족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또

다른 사랑을 가지게 된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요. 나도 어쩔

수 없는 건데요? 신영씨를 사랑하게 된 게 내 의도는 아닌데도

요?"

그가 다시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으려 했다. 나는 가만히 그

손을 잡아 내렸다.

"다시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이런 사랑을 알게 되리라고는 생각

지 못했어요. 그래서 기쁘기도 해요. 하지만,선생님. 전 새미

나 새미아빠를 사랑해요. 맘으로 다른 사랑을 가지게 된 것도

그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그 사랑의 댓가는 두고두고 제가 치

러야 할 몫이겠지요. 사랑하는데 서로 소유하고 싶은 욕심,저한

테도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는 아니니까요."

"서로 책임 질 수 있기만 하다면,각자의 몫에 대해서요. 그럼

된 거 아닐까요?"

"맘으로 하는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 있을 꺼예요.선

생님은 의사시니까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요? 몸으로 하는 사랑

은,제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을 꺼예요. 운전이나,수영을 익혀

둔 것 처럼요. 제 안에 남아 있어서 언제고 불쑥 불쑥 절 괴롭

힐 거예요. 전 감당 할 자신이 없어요.

벌써,선생님의 체취나,손의 감촉을 알게 되었잖아요. 두고 두고

고 이 따듯한 감촉이 생각 날 꺼예요. 막연한 그리움보다,이 느

낌이 절 더 괴롭힐 꺼 같아요."

"그렇게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까?"

"네. 선생님도 그건 마찬가지 실꺼예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오늘 하루의 이 소풍만으로도,전 나머

지 생이 풍요로울꺼예요. 저에게 이런 날들도 있었구나, 그 걸

로도 전 내내 행복할꺼구,새미랑 남편에게도 더 잘 하려고 노력

할 수 있을 꺼예요. 선생님도 그러시길 바래요..."

"앞으로 날 안 볼 수 있습니까?"

"그러려고 노력할 꺼예요."

"나도 그래야 합니까?"

"그러셔야 겠지요..."

"난 이제 겨우 신영씨를 알게 된 것 뿐인데요,내가 힘들고 외로

울 때 좋은 말 벗이 돼 줄 수도 없습니까?"

"그러기엔 우리,아니 전,너무 부족해요."

그는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가 차를 움직여 떠날 때 까지 가만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담배를 끄고,시동을 걸던 그는 갑가지 시동을 꺼 버렸다.

무슨 일인가, 그의 옆 얼굴을 쳐다봤다.

순간, 그는 와락 나를 쓸어 안았다. 놀라 몸을 빼려하자 더욱

죄어 들어왔다.

저항하기를 포기한 채 난 조용히 말했다.

"놔 주세요,선생님"

"가만히 조금만 그대로 있어줘요."

입술이 다가왔다.

한숨쉬며,눈을 감았다.

어릴 적 첫사랑의 입맞춤처럼 뜨겁고,행복했지만,눈물이 흘렀

다.

"미안해요.하지만 난 신영씨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어요. 내가

처음 내 속의 모든 걸 얘기 할 수 있는 여잘 만났는데,만져보

고 싶고,안아 보고 싶은 그런 여잘 만났는데, 그저 이렇게 바라

다 보기만 하고 보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요? 제가 먼저 말씀 드렸잖아요.그럼 선생님은 모든

걸 다 버릴 만큼 절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그렇다면

오늘 제 모든 걸 다 드릴 수도 있어요."

"신영씨..."

"이미,남자를 알고 있다고 해서,다시 온 사람에게 쉬울 수 있

는 건 아니예요. 언제나 사랑은 처음 인거니까요."


집에 돌아와, 이틀이나 팽겨쳐두고 치우지 않은 집안을 둘러봤

다. 내 마음처럼 어수선하고 먼지 투성이었다.

주섬주섬 정리를 시작했다. 아무 생각없이 말끔히 정리를 해 나

갔다. 새미랑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깨끗하게 정돈을 해 두고

싶었다.

거실 쇼파 위에,새미가 벗어 던지고 간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

다.

그 옷에 대고 숨을 들여 마셨다. 새미의 달콤한 냄새가 배어 있

었다.

그대로 주저 앉아 한 참을 울었다.


새벽이 어스름하게 밝아오자 눈이 떠졌다.

앞베란다로 나가 봤다.

밀밭에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내가 다시 가지게 된 사랑을 이제 이만큼에서 접어야 한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날 날 부터,어쩌면 예감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이

런 가슴 아픔도,사랑을 가지게 된 벌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남은 날을 그 형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슬프지만, 어쩌면 달콤하기도 한 그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