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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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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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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BY 사라 2000-06-12


---제희야, 이모 왔다아!

아침 일찍 들이닥친 소란스러움에 눈을 뜬 나는 두팔 활짝 벌리고 달려드는 동생의 모습이 안봐도 훤해서 웃음이 났다.

동생 덕분에 상쾌해지는 아침이었다.

---시댁에서 바루 이리로 오는 길이야. 제희는 아직 자나봐?

언니, 오늘 하루 제희 무조건 내꺼다!

근사한데 예약해 놓을테니 저녁 땐 다 거기서 합류하자구.

거실로 나가자 동생 내외가 평소와 다름 없는 활달함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마치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이나 한달 전에도 늘 그랬던 것 같은

동생의 야단법석은 정말이지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무슨일 있었나..? 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 그리고 자연스러움... 동생의 장점이기도 했다.

저앤 탤런트가 되었어야 해...하며 어이가 없다가도

이런 망연자실한 현실의 한 순간에 그나마 동생의 뛰어난 연기력이 없었으면

우리 모두 견딜 수 있었을까...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늘 하루 뿐이겠니? 일주일 몽땅 상납하래두 별 수 없지.

나의 대답에 동생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만족스러움을 표시했다.

동생 내외에게 있어 제희는 딸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결혼한 지 5년이 넘도록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동생이 제희에게 쏟은 사랑은 모정 그 이상의 것이기도 했다.

그 집착 같은 사랑에 마뜩찮아 하던 제부도 어느날 부턴가 부녀의 정으로 제희를 대하고 있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생길 때 마다 남편을 대신해서 항상 아빠의 자리에 서주었던 선량한 사람이었다.

솔로몬의 지혜 앞에서 딸을 반으로 나눠 가져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면

승자는 동생 내외가 되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나인지도 모른다.

딸아이의 반은, 어쩜 그이상도 분명 동생의 것이었다.



---엄만 잠깐 가게에 나가봐야 해. 이모하고 재밌게 보내라.

대꾸 없는 딸에게 당부 아닌 당부를 해놓고 나는 가게로 향했다.

단골 손님들이 부탁해 놓은 음반 주문서를 미처 전달하지 못했기도 했지만,

몇 일 동안의 공백을 메꾸어 줄 아르바이트생이 미덥지 못한 것도 한 이유였다.

---뭐하러 나왔어요! 괜찮다니까,하여튼...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는 내게 머그잔을 입에서 떼며 정현이 대뜸 흰소리를 했다.

가게 주인인 정현은 7일 동안의 예정되지 않은 휴가를 주면서

적지않은 액수의 돈봉투까지 쥐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영선씨 없어도 가게 잘 돌아가니까 걱정 말고 놀다 와요. 영선씬 걱정이 병이야,병...

---얼른 CD나 바꿔요. 아무리 주인이라고 자기 취향 대로만 틀면 어떡해요. 아침부터 칙칙하게....

나는 공연히 퉁박을 놓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CD를 교체했다.

뉴트롤스의 블랙앨범이 내 마음처럼 또아리를 틀고 들어 앉아 있었다.

정현의 촉촉한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괜시리 허둥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 레코드가게에서 일을 시작한 건 이혼과 동시였다.

그때 내겐 일이 필요했고, 또한 해야만 했다.

혼자 살아가기 위해선 별 수 없는 선택이었다.

터덜터덜 시내를 배회하다가 '직원구함'이라는 글씨를 발견한 순간

무작정 들어왔던 이곳에서 나는 정현을 만났다.

음악에 관한 한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도 못미쳐 있을 만큼 문외한이었던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었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그점에 관해서 정현은 농담처럼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날 만나게 하려고 그런 거겠죠. 아님,내가 지나가던 영선씨를 자석처럼 끌어 당겼거나.

이런게 운명이라는 겁니다. 하하하...

농담처럼 가볍게 다가오는 한 남자를 나도 알고 있었다.

밀어내려 할수록 용수철처럼 튕겨오는 그였다.

생에 있어서 어느 누군들 예기치 않은 일에 준비되어 있겠는가.

계획하며 다가오는 사랑이 얼마나 될 것이며,

갑작스럽게 소용돌이 치는 감정의 허위로부터 꼿꼿하고 일관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그여자도 내게 그 비슷한 말을 했었다.

까페 여주인이라는 서른 세살의 그 독신녀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녀를 첫대면한 당혹감은 어이없게도 내 상상이 완전히 빗나간 데서 오는 엉뚱함과 이질감에서 기인했다.

박색이 아닐 정도로 못생긴 얼굴에 작고 삐쩍 마른 볼품 없는 몸매의 그여자는 옷차림도 지극히 수수했다.

이루말 할 수 없던 그 배반감은 순간적으로 나를 화나게 했던 것도 같다.

남편을 새로운 사랑의 포로로 만든 여자,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들게 만든 여자,

그러나, 내 상식의 허를 찌른 그여자는

남편을 단번에 매료시킬 만한 아무런 근거도, 카리스마도 없었다.

침착한 시선처리로 그여자가 조분조분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여자의 구석구석을 탐정처럼 염탐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사모님께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같은 여자로서 못할 짓이란 거 잘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제게 불시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서

저역시 자유로웠던 기억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한가지만 알아 주세요.

지금 이런 상황이 사모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던 의도는 추호도 아니었다는 거...

누구를 아프게 하기엔 사랑의 상처가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던 그여자.

뒤돌아 나오는 나의 귓등을 맴돌던 여자의 마지막 멘트는

이상한 여운으로 남아 오래도록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여자를 만난 건 나의 실수였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아차 하고 깨달았을 땐 모든 것이 이미 늦어 있었다.

남편의 외도가 단지 외도가 아니라는 걸, 단지 불륜이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돌아서던 나의 몰골은 완전한 패배자의 그것이었다.



<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