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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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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사라 2000-06-05



그러나, 부푼 희망과 설레임으로 나갔던 그자리에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시간,두시간...세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보기좋게 바람을 맞은 그날밤, 그녀는 먼저 접속한 상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질책하지도 힐난하지도 않았으나 컴퓨터 저 너머의 그녀는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정말 가고 싶었어...그랬는데....차마 갈 수가 없었어.

내가 어땠는 줄 아니? 줄기차게 남편에게 시비를 걸었지. 난 계속 싸울 궁리만 했고,

어떤 식으로든 남편과의 골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어.

그렇게라도 널 만나는 당위성을 만들고 싶었다.

나 자신을 합리화 시켜야 할 명분이 필요했어. 그래야 내마음이 편할테니까....

그런데 이 남자,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남자, 무조건 날 이해하려는 남자....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

차라리 남편이 먼저 바람이라도 났으면...

차라리 니가 유부남이라서 둘다 똑같이 도덕적으로 망가진다면...

그렇게 면죄부만 찾고 있는 여자.

나도 알아, 내가 얼마나 비겁한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녀가 절규하고 있었다.

엔터키 한번 칠 때마다 떠오르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나는 보았다.

아,당신...날 봐요. 울지 말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봐요. 난 당신을 욕하지 않아요.

당신이 도덕적으로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고 해도 난 당신에게 침뱉지 않아요.

내 말 듣고 있어요?

내가 내미는 손 당신은 그냥 잡기만 해요.

그이상 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아시겠어요?

어항 속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어요.

그 어항의 한가운데를 유리벽으로 가로막았지요.

유리벽 너머로 빵을 놓았지만, 물고기는 자꾸만 유리벽에 부딪쳐서 그 빵을 먹을 수가 없었답니다.

유리벽을 치운 후, 그러나 물고기는 더이상 그 빵을 먹으러 가지 않았어요.

물고기 머릿속의 유리벽은 아직 그대로 였으니까요.

그녀를 무섭게 억누르고 있는 도덕의 잣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관념의 사슬로부터 나는 그녀를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내 능력 밖의 일이 아니라면 나는 정녕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녀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번째 약속에서 그녀는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너의 진정성의 승리야...멋쩍은 미소로 그녀가 말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였겠죠...실없는 내 대답에 그녀가 해사하게 웃어주었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었고, 차를 마셨고, 가볍게 진토닉을 마셨다.

컴퓨터 저 너머에서 그토록 거침없고 재기발랄하던 그녀는 그저 수줍게, 그리고 상념에 가득한 얼굴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야겠어...

쇼윈도우의 마네킹처럼 굳은 얼굴로 승강장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이 잡아 끌었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여관을 향해 돌진했다.

뜻밖에도 그녀는 의연하게 나를 따라 주었다.

거부하지 않는 그녀가 나는 그저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나는 샤워를 하겠다는 그녀를 막아선 채 거칠게 끌어안고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난 지금 당신의 땀냄새 조차도 물들이고 싶은 사람인걸요...모르겠어요?...

식탐하는 아이처럼 허겁지겁 달려들며 나는 그녀를 차례 차례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문이 있었고, 그 문 열어 젖히면 또다른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상심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애써 의연한 척 했으나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에게 오히려 나는 연민을 느꼈다.

그런 나의 정성에 드디어 그녀의 육체가 온전히 열리기 시작했다.

깊고 은밀하게 숨어 있던 마지막 관문이 열리고 그녀와 내가 한 몸이 되는 순간,

비로소 그녀는 태초의 여성으로 돌아가 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피가 역류하는 격정의 순간이 끝나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고 싶음 우세요. 미련하게 참지 말고 실컷 울어요.

격해지는 감정을 자제하는 그 처절한 흐느낌 앞에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한마디 외에는 떠오르질 않았다.

그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내 가슴에 파묻혀 울었다.

꺽꺽 소리내어 울었다.

가슴 한켠에 알싸하고 서늘한 서러움이 밀려들며 나는,

이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내가 예감했던 대로 한동안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녀는 접속해 있으면서도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나에겐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또한 내가 그녀를 이해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녀로부터 한통의 메일이 날아온 것은 긴 터널을 빠져나오듯 지루한 시간들이 흐른 뒤였다.

*******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어.

니가 보내는 편지는 다 받아보구 있다.

고맙다는 말 밖엔 지금 떠오르질 않아.

우리 이렇게 통신 속에서 서로를 지켜보며 늙어 갔음 좋겠다.

니 아이 백일 때 축하메일 보내주고, 우리딸 대학입학 때 너의 축하 받으면서....그럴 수만 있다면 말야.

*******

나는 알았다.

바보같은 그녀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리란 걸.

그리고 나 역시 알았다.

이 짧고도 우연한 만남이 내 생애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