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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뇌진탕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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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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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사라 2000-06-05




그녀를 만난 후로 나에게 있어 컴퓨터는 오로지 한 여자에게 이르는 길이었다.

거대한 문명의 상징도, 정보의 바다도, 그 무엇도 아닌

단지 그녀에게 도달하게 하는 도구며 수단일 뿐이었다.

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그녀만 생각하면 나는 이렇게 가슴까지 타들어가는 막막함으로

밑도 끝도 없는 공허감에 사로잡힌다.

그날밤 장난처럼, 습관처럼 들어갔던 대화방에서 나는 거짓말처럼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매우 솔직했고, 개구졌으며, 장난끼 가득했으나 또한 진지하고 사려 깊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그녀와 나는 물만난 고기처럼, 오랜만에 만난 속사포 수다쟁이 아줌마처럼, 신들린 무당처럼

다양한 화두 속에서 함께 허우적 거렸다.

네 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연상과 연하라는 그 어떤 외부적인 조건도

우리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감에 있어 아무런 장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눈깜짝 할 사이에 흘러가버린 시간 위로 새벽 여명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에 강렬하게 휩싸이고 있었다.

이 여자, 섬광처럼 내 앞에 나타난 가상의 존재 같은 이 여자...

스펀지 속으로 흠뻑 베어든 맑은 물처럼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어느새 내 마음속 깊이 들어와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광속도로 나를 헤집어 놓기 시작한 그녀는

서른 살이었고, 한 남자의 아내였고, 한 아이의 엄마였다.



이럴 수도 있다는 걸, 이렇게 사랑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걸 스스로 의아해 하면서도

나에게 처해진 현실에 의구심을 품고 있을 여유가 내겐 없었다.

퇴근하고 오자마자 컴퓨터로 달려들어 그녀를 찾아나서고 있는 내 모습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제어할 여력이 남아 있질 않았다.

에너지는 온통 그녀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꼬박 이틀 동안 나는 그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곳저곳을 건성으로 들쑤시고 다니면서 나의 눈과 귀는

오로지 그녀를 포착하기 위해서만 열려 있었다.

퍼붓듯이 숱하게 띄워보낸 메일은 응답이 없었고,

그녀는 숨바꼭질 하고 있는 사람처럼 꼭꼭 숨어 있었다.

스물 여섯해를 살아오는 동안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런 행위가 처음인 건 아니었으나

그녀는 내게 특별하면서도 낯선 케이스였다.

그녀는 유부녀 였고, 그래서 더 멀리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를 더 애틋하고 초조하게 만들고 있던 것이다.

그녀가 나의 레이다망에 걸려든 것은 정확히 삼일째 되던 날,

천년처럼 긴 시간이 흐른 후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그녀를 만난 반가움에 앞서,

내가 그녀를 찾아 헤맨 그 끔찍했던 이틀에 대한 보상심리처럼 다그치고 있었다.

---응, 이사했어. 짐정리 이제서야 대충 끝내고 지금 막 들어온 건데....

니가 보낸 편지더미에 나 깔려 죽는 줄 알았다.

저멀리서 그녀가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온갖 망상을 하며 미로 속에서 혼자 헤맸다니...

나는 갑자기 진이 빠져서 온몸에 맥이 풀렸다.

그러나, 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 망망대해 속에서 혹여라도 다시는 못만날까봐 마음 졸이게 했던 그녀가 무사했으니,

무사히 이렇게 다시 내앞에 나타났으니,

그래요,그거면 된 겁니다....

내 마음 속의 목소리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