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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축제의 밤


BY 로미(송민선) 2000-06-08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대면서,친구에게 울면서 하소연하는,그러다 아무데서나 토하고 널부러지는 그런 여학생들의 모습을 가끔 볼 때마다 속으로 경멸 하곤 했다. 그런데,오히려 그런 모습들이 그 날 이후엔 측은함으로 다가왔다. 나도 그래 볼까 생각 안한 건 아니지만,그러기엔 너무나 내 자신이 초라했다.
성진에게는 물론이지만,마음 놓구 지내던 태경조차도 정말이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내 자신을 더 이상 초라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보호본능에서 였는지 몰라도 나는 한동안 뜸했던 써클일도 열심히 했고,교지편집위에도 부지런히 드나들며 심부름을 했고,강의시간에 후다닥 들어갔다 끝나면 누가 잡는 것도 아닌데 도망치듯 나와 사라져 버리곤 했다. 물론,현애나 유정은 호기심을 억누르고,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대하려 했지만,차라리 물어오는 것보다 서로에게 더 힘이 들었다.
가끔,태경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했고,누군지 알 수 없는 전화가 오기도 했지만,일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내 상처에 굵은 소금을 한 무더기 뿌려 얹어 놓고,아파서 신음하는 날 잔인하게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한 달 가까이나 그런 식으로 지내던 난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 뭐야,사실,아무것도 아닌 일에,성진이 언제 널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라도 있는거야? 그저 몇 번 만나 얘길 나누고,차를 마신 사이에 불과한데 지금 뭐하는 거니,경진이 넌? 네 꼴이 정말 우습지 않아? 뭣 땜에 니가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건지...
그?O다. 그런 식으로 가닥을 잡은 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돌아가려고 했다. 그렇게 행동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불안해 하면서도 밝아진 나를 맞아줬다. 성진과도 마주칠 수 밖에 없었지만,언제나 밝은 웃음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곤 빠르게 지나쳤다.할 말이 있어보이긴 했지만 성진은 날 잡지도 못했다. 그렇게 가을이 다가오고,,,축제기간이 시작됐다. 써클 선배들을 따라서 축제기간에 공연할 대동제프로그램을 연습하고,여기저기 다니면서 스폰서를 만드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축제는 내게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날도,친구들은 모두 쌍쌍파티에 가던지,다른 구경거릴 찾아 나서고,혼자서 터벅거리며 도서관쪽으로 향해 걷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내가 간 곳은 성진에게 손목을 끌여 들어갔던 5층 빈 강의실이었다. 거긴 여전히 아무도 없이,누군가 밤세워 술 마시고 늘어놓은 쓰레기만 뒹굴고 있었다.
창가에 걸터 앉아 보니,숲이 보였다. 멀리 운동장에선 떠들썩하고 유쾌한 축제의 소란스러움이 전해져 왔지만,내 눈앞에 숲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 안을 들여다 보면,친구끼리 정답게 얘길 주고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연인끼리 소근거리기도 할 것이고,술 판을 벌이는 이들도 있겠지. 턱을 괴고 앉아 숲을 바라다보며,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뭣 때문일까, 너무 서러워져서,눈물이 그쳐지질 않았다.
-그래,,오늘 만 우는 거야,,,오늘 만,,,,

"마누라,여기서 뭐하는 거야?"
태경이 바라다 보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어느 새 태경은 내 곁에 앉아서 싱글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바람 피운다고 여기서 이렇게 울고 있냐? 너,너무 청승맞다."
언제나 태경의 위로는 이런 식이었다. 단 한번도 내게 무얼 물어보거나,들으려 하지 않았지만,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
"그만 하고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나 또 실연 당한 거같애"
"혼자 가"
"야,,말이 되는 소릴 해.마누라를 두고 혼자 어떻게 가냐?"
"그런 놈이 맨날 바람을 피워?"
"마누라가 딴데 정신 팔구 다니니까 그렇지"
"웃기고 있네...술 안마셔. 너 혼자 가."
"가자아...너 취해서 주정하면 내가 다 받아줄께,집에두 업어다 주고."
"싫어"
"야,치사하다 정말.내가 산다니까"
마지못한 척 태경을 따라 나섰다. 학교 안에 가설 된 주점도 많았는데 태경은 굳이 교문 밖의 아줌마 집으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태경은 과장된 몸짓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야,,현애가 날 사람취급을 안하네.."
"......."
"니가 보기에도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냐?"
"그냥 친구로 지내고 싶대잖아.넌 자존심도 없어? 귀찮게 하지마. 현애는 너 친구이상은 아니라는데 자꾸 왜 그래?"
"왜 니가 화를 내?"
"화가 안나,그럼? 병신같이 굴지 말구,제발 정신차려!"
"그건,내가 너한테 할 말이지..."
"뭐? 뭐라구?"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너,그러구 다니는 거 정말 못 봐주겠단 말이야"
"됐어. 뭘 못봐줘?,서방이라는 게 마누라 앞에서 딴 여자 얘기나 하는 주제에.."
"그렇긴 해,,,근데 남 얘기 할 처지가 아니잖아?마누라도.."
더 이상 태경은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 쯤에서도 난 충분히 위로받았고,오랜 만에 유쾌하게 태경과 얘길 나누며,술을 마셨다. 그 밤,성진만 나타나지 않았다면,내 어설픈 사랑은 그쯤에서 막을 내리고,난 다시 새로운 맘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도 같다.

태경이 화장실 간다고 자릴 비운 채 얼마간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자,아무래도 너무 취해서 쓰러진 건 아닐까 걱정이 된 나는 태경을 찾아 나섰다. 화장실이 건물 옆으로 한 참 돌아가야 하는 까닭에 투덜거리면서 태경을 불렀다. 그런데 내 눈 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야,이거 못놔!"
"이 새끼가?"
성진과 태경이 멱살을 잡은 채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다.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간 그럴 생각은 정말 아니었는데 다짜고자 뛰어들어 태경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소릴 질러댔다.
"뭐야? 너 미쳤어? 왜 얠 패고 난리야?"
"태경아,괜찮아? 괜찮아?"
미친 듯 소리쳐대는 내가 어이가 없었던지 멍하게 성진은 날 쳐다 보았다. 뒤에 알았지만,팬건 성진이 아니라 태경이었다.
"뭐라구? 다시 말해봐? 뭐라구?"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만 보던 성진은 달려들어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오히려 침착해져버린 난 씹어뱉듯 말했다.
"어,뭐야?치려구?여자만 울리는 바람둥인줄 알았더니만,거기다 주먹까지? 인간 쓰레기구만. 쳐봐, 어디?"
그의 눈에 어리는 분노를 오히려 슬픔처럼 느끼면서도,난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용히 어깨를 푼 성진은 말없이 돌아서 가버렸다.
"경진아..."
"왜 맞구 그러냐? 바보같이."
"조강치천 다르구만,,,근데,내가 친거야 임마!"
"뭐?"
"내가 친거라구"
"....."
"가봐,성진이한테..."
"맞아도 싸지 뭐. 맞을 짓을 하니까 맞겠지 뭐."
"경진아,그러지 말구,가 봐."

버스를 타고 떠나는 태경을 보고, 이렇게 된 이상 성진을 찾아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어쩌면 내가 뭘 오해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어디서 찾아야 할지 막막했지만 여기저기 둘러 보고 다녔다.갑자기 그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찾지 못하면 어쩌나 울고싶어질 정도 였다.
그를 처음 만나던 날, 그가 날 이끌고 갔던 수돗가가 있는 곳까지 가봤지만 그가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그를 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지 뭐.
절망에 가까운 심정으로 그 밤 난 집에 오는 버스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