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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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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BY 유수진 2000-08-20

그날은......

높고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가을햇살이 세상을 적당한 온도로 포근하게 얼싸안아, 신선한 바람끝이 기분좋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병원에서, 한달에 한,두번씩 의사의 허락아래 외출이 통과되는 이유로, 난 사랑원에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나의 결혼식이 있는날 아침이다!

형님은 내가 방문할때마다 치수를 재가며 재봉질로 정성스럽게 완성한 심풀한 하얀 드레스를, 손수 입혀주셨다.

가슴부분이 라운드로 시원스럽게 패인 반팔 소매에, 가슴 밑으로 불망으로 확 퍼진 디자인이, 내 임신 7개월의 퉁퉁 부은 몸을 완벽하게 커버해주었다.

"자아, 리본으로 머리 묶고...
미사포는 사랑원 강당 가서 쓰자."

"형님....
저.......
빨간 립스틱으로 바꿔 발라 주세요."

언젠가 경진이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가슴 두근거리며 발라봤던 빨간색!
꼭, 한번 발라보고 싶었다.

형님은 소리나게 웃으시며, 분홍립스틱이 칠해진 내 입술을 티슈로 지우고, 빨간 립스틱으로 바꿔 발라주셨다.

"형수님, 다 ?耭楮?
의사선생님께서 시간을 얼마 안주셨어요.
빨리 가야할거 같은데....."

"네....
도련님...
아니, 서방님.
들어오셔도 되요."

'딸깍!'

짙은 곤색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문앞에 선체, 과장스레 놀란표정을 지었다.

그의 의도된듯한 장난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야~
우리 각시.
단발머리 여고생 각시는 어디가고, 성숙한 여인이....
우리 각시될 사람 맞아?"

움츠러든 어깨에, 귀까지 화끈거렸다.



휠체어를 밀어주는 그의 손....

시간이 멈췄다 다시 흐르는것처럼,
마치 그동안의 일들이 모두 꿈인것만 같았다.

언젠가....
이 손이라면....
내 모든걸 다 맡겨버릴거라고 확신하던 그때.

행복이란,
이런거라는거...
이렇게 가슴 벅찬 전율이 온몸을 떨게 한다는거,
행복해도 눈물이 나온다는거 이제야 알았다.

이제 손만 뻗치면 오빠를 만질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 남자를 보고 싶을때,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더이상 혼자 독백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들판에 내동뎅이 쳐졌던 잡초가 드디어 꽃을 피운것이다.




'농산물 직거래 센타'라고 써있는 큰 간판의 3층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옆으로, 입구에 '사랑원 강당'이라고 새겨져 있는 하늘빛 볼품없는 단층 건물이 보였다.

아름드리 작은숲을 끼고, 건물 서너채가 줄지어 서있는 모습도 언뜻 언뜻 스쳤다.

차에서 휠체어를 내릴새도없이 나를 번쩍 안고 뛰듯이 걸어가는 그를 나무라고 있는데, 강당 입구에 눈에 확 뜨이는 웅장한 거목한그루가 보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그 커다란 거목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부드럽게 애무하던 몸통의 결모양이며, 자태.....
아무리봐도 눈에 익었다.

설마.....

앙증맞게 꽂아놓은 팻말을 내려다봤다.
난.......
내눈을 의심했다.

그 팻말에는 '해인이의 화니'라고 또박 또박 적혀 있었다.

"오빠!"

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진재오빠는 나를 보고 빙긋 웃는게 아닌가.

"내려줘요!
빨리!"

휠체어에 뛰듯이 내려앉아, 바퀴를 돌려댔다.
그러나 얼마 못가,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이 바퀴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질뻔했다.

"해인아!"

달려와 휠체어에 제대로 앉혀주는 오빠에게 숨가쁘게 물었다.

"오빠!
저거 맞아요?
화니, 맞아요?"

"그래, 맞아!
다치겠다."

휠체어로 화니 주위를 뱅글 뱅글 밀어주며, 진재오빠가 내귀에 속삭였다.

"해인이....
여기서 고백을 해야겠다.
너무 놀라면 안좋을거 같아....
너의 화니상자에 있던 작품들....
전부 우리 사랑원 강당에 전시돼있어.
니 전시회 준비 하느라 정신 없었다.
사랑원 아이들이 액자에 그림 집어넣고,
집어넣지 못하는 녀석들은 액자 호호 거리며 닦아대고....

니가 사라져버린 후에도 아이들은 전시회를 준비했지.
난 널 찾아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이잡듯 뒤지고 다녔고....

그리고, 너를 병원에 둔체, 이 전시회를 마무리 했다.

난 너하고 하루도 떨어져 있었던게 아니야.
알겠니. 해인아.....
언제나 너의 그림속에서 너의 아픔을, 너의 고통, 너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 받았고, 도란 도란 얘기도 나눴었지."

뜨거운 감격이 쏟아져 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수가...."

"이 모든건 해빈이와 경빈이의 도움으로 가능했던거야.
오늘.....
경빈이도 왔다."

난 흐느끼고 있었다.

"흑....
흐흑....
나...
난.....
흐흐흑....."




천천히 강당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병신들이라 칭했던, 나의 모습들이 있었다.

머리가 기형적으로 큰아이, 온몸을 뒤튼체 바닥에 누워있는 아이들, 사지가 없는 소년, 다훈증후군 청년, 언청이 소녀들....
그 속에서 방순언니가 옛날 그모습 그대로 병채의 부축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우.......우어우어....우어...우우..."

"해에인.....해에...인....
추...추추.....아해에....오오..."

"어어이....어어...이어이어...."

"에인......에...."

"짝짝짝.....짝....짝....."

그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여기저기 온통 내 아련한 아픔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자궁.....
열정.......
지옥, 불, 분노, 암흑, 박동, 박차........

내 그림의 제목들도 액자 하단에 깨끗하게 붙여져 있었다.

아아.....

어떻게.......

이 감격의 순간에,
갑자기 숨이 차올랐다.

답답하고 가쁜 가슴을 오직 정신력으로 버티며
경빈을 찾기 시작했다.

두리번 거리는 내게 진재오빠가 속삭였다.

"오른쪽 구석이야."

경빈이......

눈물을 가득 글썽이며, 벌개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동생.


경빈이를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천천히 걸어나오는 우리 경빈이는.......



'경빈아 만약.....
내가 이 그림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없을때에는
니가 내대신 이 그림들 볕으로 끌어내줘.'

'누나, 그러지마. 무서워.
이 그림들, 같이 햇빛 보여주기로 했잖아.
꼭 영화속 주인공처럼.....왜그래,
그렇게 해도 하나도 안이쁘다.'

'너, 벌써 니짝한테 빠져서, 이 누나 괄시 하니?'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 내 짝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이뻐!'



경빈이는 내게 약속을 지킨것이다.
우리 멋진 어린왕자는 이 누나에게 약속을 지킨것이다.
너무 대견했다.

"누나......."

"경빈......"



"....서방님....
해인이 안색이 별로 안좋은데요.
얼른 미사 진행하고 병원으로 다시 가는게 좋을거 같아요."

"아니......에요.
형님......
저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렇게 정신없이 검은 옷의 신부님을 언뜻 본것도 같고....
그렇게 나는 또, 정신이 희미해져갔다.

'오빠.....
이거 꿈 아니지.
나 꼭 다시 올거야.
화니랑, 경빈이랑, 내 작품들.....
내 분신들 보러....
꼭!'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