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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님 조금만 참으시게


BY 만석 2024-01-08

6일. 시아버님의 제일이었다.
그동안 코로나로, 또 제주인 영감의 와병으로 서너 번의 제사를 패스했다.
영감은 무척 섭섭한가 싶지만, 시아버님 가신 지가 이젠 십여 년도 지났으니 딱히 가슴 쓰린 자식은 없지 싶었다. 단지 영감의 섭섭한 마음이 옆에서 보기에도 오래 갔다.

이제는 추운 겨울 먼 곳에서 떠나 오기도 귀찮은 따님들이기도 하겠다. 아니, 요번 제사를 지나고 보니 가까운 서울에서도 못 오는 시누들이 대부분이다. 큰 시누이도 팔순이 불원하고, 막내도 참석하지 못하는 형편이 당연했다. 큰 시누이 내외는 큰따님이라는 책임이 있어서일까. 아니다. 워낙 시부모님 생전에도 효녀였지만, 이젠 계단을 오르는 걸음걸이가 심히 걱정스럽다.

사실 다섯 시누이가 드나들 때는 일도 많았고 음식 하기도 어려웠지만, 지금은 반도 안되는 수고지만 나이가를  먹으니 참석만도 어려운 형편이다.  내가 더 효녀라고 시샘을 하던 다섯 시누이도 이젠 다니기에도 벅차니, 이제 제사를 그만두자 해도 영감을 제외하고는 크게 나서서 반대할만한 제군도 없겠다. 영감도 큰시누이도 엎뎌서 절을 드리는 모양새도 곱지 않으니 말이다.

시어머님 살아 생전에는 제사를 지내고, 시댁으로 나서는 시누이마다 한 보따리씩 들려보냈다. 그것이 사돈댁에 대한 내 살림이 넉넉하다는 과시이기도 했고, 시어머님의  따님에 대한 고루한 사랑이었으리라. 다섯 따님을 하나같이 맏이로 보내신 시어머님의 따님에 대한 자존심이 발동하는 것을 알만했다. 다른 동서들한테 따님이 뒤쳐지는 건 보지 못하는 시어머님이셨으니까.

그 뿐이랴. 내가 결혼을 하고도 오랜 동안 제사가 끝나면 이웃에 한 상씩 그득히 채워 식사를 날랐으니, 동네 행사였고 그도 대가댁의 자기과시였다. 귀한 외아드림은 아까워서, 그 밤길을 외며느리 몫으로 정하셨으니..... 그래도 군소리 한 번 못하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절차로 섬겼으니,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용했다. 그 일은 내가 내 일을 시작하고도 퍽 오랜동안 이어졌다.

내가 집안 일을 도맡게 되면, 내 며느리에게는 절대로 이런 일들은 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작심을 했다. 역시 돈의 힘은 위대했다. 나의 경제활동이 번성해지자 본제사 외의 대부분은 내 입김이 크게 작동을 했다. 제사도 내가 맘만 먹으면 참석을 마다해도 크게 낭패가 아니었으나, 워낙 대가댁으로 군림을 하던 시부모님의 형제들과 대립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같아 시도도 하지 못했다.

나는 요새로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유튜브>를 늘 듣는다. 고부간의 갈등 사연이 대부분이다. 그 사연 자체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요새 젊은세대를 들여다보는 창구로 안성맞춤이다. 며느님을 둘씻이나 거느리고 사는 대가족이라, 그들의 사연이 나를 많이 가르치고 반성하게 한다. 이제는 사라지는 세대로 악을 쓰며 고집을 피우려 하지는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젊은세대의 편에 서게 된다.

물론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특성상, 시어머니의 며느리를 향한 사연보다 며느님들의 불만의 사연이 압도적이다. 혹, '그건 아닌데.'하는 사연마저도 나는 이해를 구한다. 시절이 그렇고 세대가 그러하지 않은가, 영감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버린다면, 나는 주저 않고 제사를 끝낼 것이다. 뵙지도 못한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들 제사는 그만 두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서야지. 암. 우리 집은 내가.

<나는 만지지도 못하게 합니다. 이틀 사흘이 걸려도 늘 조용히 며느님 혼자서.....
엄마가 혼자 일하는 게 어린 손녀가 보기에도 안쓰러웠나 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