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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의 끝은 어디에..


BY 가을단풍 2024-01-04

2017년도 겨울이었다.
나는 이곳 작은 소도시에서 봉사 활동을 하다가 지도자와 회원들 사이에서 심한 갈등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나의 심정을 누명이라고 표기 하였었다.
온갖 정성으로 사랑하고 봉사해오던 단체였기에 실망과  분노와 좌절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탈퇴를 하려고 마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오랫동안 그곳 회원들과의 나눔으로 행복했던 시절이 많았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내가 사회에서 추락하는 것 같은 자존심이 손상이 되어
 2018년에 대학으로 진학을 해버렸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학을 공부하고 이제는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공주 교대 대학원생이 되어 3학차를 기록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누명은 금방 벗겨지고 구설에 꼬리 또한 싹뚝 잘렸지만 내 몸 한 부분에 잘려나간 꼬리의 흔적이 상처로 남아 나를 슬프게 했다.
그냥 계산 없이 공부했다.
조금 위로가 되었다.
고졸 딱지도 떼고 나니 자존감도 향상 되었다.
다시 내가 속해 있던 봉사 단체에서 평회원으로 남아 활동 했다.
이렇게 세월이 흘려  6년이 넘었다.
그래도 완전히 상처가 치료 되진 않았다.
가끔 내 꼬리의 흔적이 까칠 까칠하게 느껴졌다

  기도를 할만큼 했다.
불교 경전을 읽을 만큼 읽었다.
그래도 완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상담사의 자격이 주어지고 센터에서 봉사하고,
부부 상담도 하고, 청소년과 아이들 상담도 하고 일명 남의 괴로움을 해결해주는
상담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자기 고민을 해결하고 ,좋아지는 것을 보며 뿌듯하기도 했다.
돈이 조금씩 생겼다.
남의 돈을 10원도 못 벌던 내게 수입이 생긴 것이다.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투자하기로 맘먹고 나도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상담을 받았다.
이는 나에게 감정의 찌꺼기를 걸러 내는 작업이 되기도 하지만
상담사도 내담자로써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담 이론과 실제를 상담 현상에서 배워가는 계기가 되었다.
나를 상담해주시던 교수님께서 나를 "고구마 줄기라고 부르셨다."
무슨 여자가 캐도 캐도 끝이 없이 고구마 줄기처럼 사건이 딸려 나오는지....하고 말씀 하셨다.
겉으로는 봉사 활동 하다가 생겨난 갈등으로 들어 났지만
긴 세월 살아가면서 갖갖이 사건이 많았기에 내 삶에 피고름이 졸졸이 들어 나기 시작했다.
현제의 고민도 아닌, 과거의 고민이었기에 그냥 내버려두려 했던 것이 상담을 받으면서 확
떠오른 것이다.
30대에 실패한 아들에 대한 죄의식과 슬픔.
딸아이 교통사고와 수술,분노 ,불안 슬픔,
남편과의 갈등, 시댁 식구들과의 사랑과 갈등
이런 것들이 되살아나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특히 시부모에 대한 감정은 양가 감정이 남아 있어서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신혼초기 사랑받던 감정과 세째딸 낳고 아들 못 낳았다고 설움 받던 감정이 서로 뒤 엉켜 곤두박 질치기도 했다.
마음이 힘들다 보니 상담을 받으면서 남편과의 갈등도 들어 나서 좆나 싸웠다.
시댁 형제들과도 조금 멀어졌다.
이렇게 사는 동안 5년을 남짓으로 시부모 친정 부모 4분이 모두 돌아 가셨다.
어느 해 인가는 친정 아버지와 시어머니가 5개월 사이로 두 분이 돌아 가셨다.
참 어리석게도 나는 시아버지를 아주 잘 모셔서 돌아가시고 49제를 지내고 난 후 시댁 형제들과 갈등을 겪었다.
남편과 피터지게 싸웠다.
이유는 49제를 제대로 지내주지 않아서 였다.
우리 시어머니의 삶이 너무 슬프고 제대로 애도를 안 해주는 시댁 형제들이 먹는데만 정신이
없었던 것이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참말로, 진짜 참말로  어리섞게도 말이다.
49제의 관점은 불자인 나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비불자 그들은 부모가 돌아가셔도 맛난거 해주는 올케를 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어머니의 자리에 내가 동일시( 시어머니 입장이 내 입장이 되는 것)되었던
것 같다.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애도 한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 삶을 닮은 내 중년을 삶을 애도 한 것이다. 3년을 지랄을 하다 보니, 내가 이제 너무 하는 구나, 이제 지랄 할만큼 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고 상담 받고, 상담하고 이런 것들로는 나의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았다.

  불교 경전인 금강경을 세벽마다 3년을 읽었다.
너무 많이 읽어서 금강경이 입에 붙어 버렸다. 외우는 부분도 많다.
삼사십분에 읽던  금강경을15분에서 20분이면 휘딱 읽어 버린다.
금강경 4구게가 뭔지 알게 되고, 금강경 전체를 통으로 알아 들을 정도가 되었다.
요즘은 방학이 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허락 되어서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독송하며
이제는 세세한 뜻풀이로 들어가서 세분화하여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 했다.
그러니까 3년 넘게 금강경을 통으로도 읽고, 쪼개서도 읽고, 입으로도 읽고,가슴으로도  읽고
읽고 또 읽고 아마도 4년째로  들어선 것 같다.
 "아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람들 간의 갈등의 요지는 덜 자란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금강경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부처님께서 누구나 아상 인상, 중생상,수자상 (나라는 생각,너라는 생각,중생이라는 생각 ,영혼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도 구제할수 가 없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도 없고 영혼도 없음을 깨우치자면 자기애, 즉 자기대상의 집착이
줄어들며 집착이 줄어 들게 되고(응무소주 이생기심)
 저절로  연기법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일체 유의법, 여몽환포영,,여로 역여전, 응작여시관"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이슬과 같고 전기와 같으니 그리 알아라."
이 세상 한번 왔다가는 꿈 같은 세상인데 무얼 그리 고민하는 건지,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세벽 기도를 하다가 많이 운다.
요즘은 나 때문에 마음 아팠던 가족에게 미안해서  운다.
봉사 활동을 하다가 생겨났던 사람들 때문에 울지는 않는다.
그들은 내가 껴 안아야 하는 대상 일뿐이다.
우리 남편은 여전히  잔소리가 세다.
현관문을 안 닫았다고 잔소리.
창문을 열어 놓으면 창문 열었다고 잔소리
전등불  안 껐다고 잔소리, 실래화 여기저기 벗어 놓은 다고 잔소리........
잔소리 대왕 우리 남편을 바라보며 피식 ~ 웃었다.
"음- 아직 힘이 있군, 더 오래 잔소리 햐. 힘없으면 못할거 아녀"하고 말해버렸다.
며칠전에 남편이 하두 방구를 빵빵 뀌어 대길래 방문을 열어 놨더니 마누라 코 썪는 생각은
안하고 창문 열어 놨다고 또 잔소리를 했다.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예 더 하셔, 가릉빈가 노랫소리로 듣겠습니다." 하고 말해버렸다.
가릉빈가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사람 모양을 한 상상의 새 이름이다.
훗훗,,,

  며칠 전 봉사 활동을 하다가 접시를 닦았는데 일을 못한다고 회장님한테 두어차례  꾸지람
을 들었다. 여전 같으면 화가 나서 얼마 동안 불편한 마음을 끌어 안고 살았을텐데
나는 회장님의 허리를 꽉 껴안아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나 안놀고 열심히 했거 든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회장님께 커피를 사드렸다.
'저자리 지키려면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랴.'
그리고 나는 나를 잘 안다.
육체적인 일에 잼병이다.
그러니 일을 잘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속이 터질까.
꼴에 재주라고 웃 사람들 비위를 잘 맞추어 웃 사람들께 신임은 받는다.
세빠지게 접시 돌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뿔딱지가 날 수밖에.
나는 이런 것들이 억울했다.
웃 사람에게 신임은 그냥 받는가?
 신임 받을 짓을 하기 때문이지. 이도 고달프긴 마찬 가지다.
나는 어른을 늘 섬겨봐서, 자동적으로 노인들이 불편함이 없는 가를 살피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의 수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서로가 자기만 억울할 뿐이다.
누명의 끝은,
 갈등 해결의 끝은 덜 자란 마음을 키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품이 좀 넓어져서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학교 다니고 상담 받고 상담하고 최고의 경전인  금강경 독송 공덕으로 내 삶이 너무 많이
변해가고 있다.
예전에 "내 성이 고씨고 이름은 민중"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성을 (참)으로 바꾸고,이름을 (마음)"로 바꾸고 싶다.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불 보살님께 감사드리며,금강경 독송을 지도해주신 공주 마곡사 성관스님에 뜨거운 감사를 드리며, 함께 공부해온 법우님들께도 감사 드리고 싶다.
 깨어 있는 이자리  늘 여여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내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나를 대학으로 이끌어주신 박00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이00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나의 학우들에게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