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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을 기억하다


BY 귀부인 2022-11-23








아버님을 기억하다



쉰 다섯의 젊은 시아버님을 처음 뵌 건 시어머님이 차린 밥상 앞에서였다.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빗어 넘긴 머리는 반들반들 윤이 났다. 흰 머리카락 

하나 없는 먹빛이었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송곳처럼 날카롭게 꽤 뚫어 보듯

강렬한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헉! 숨이 막혔다.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 깔았다. 



아홉 형제 자매의 장남이요, 당신 자녀 다섯을 둔 아버님은 집안에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이셨다. 아버님 말씀이 법이요, 말씀에 토를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부장제의 표본이셨다. 그런 아버님 앞에 큰아들이 데려 온, 아버님 수하에 있지 않은 낯선 아가씨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하셨다고 한다. 정작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남편 말에 의하면 아버님은 며느리가 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쩔쩔 매셨다고 한다.



신혼여행 다녀와 인사드리러 갔을 때, 시댁의 가풍도 익힐 겸 1년은 같이 사는 게 도리라는, 가슴이 쿵 떨어지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30년 전이라 개조하지 않은 부엌에서 불을 지피던 나를 보시고, 너한테는 모든 게 불편하겠다시며 얼른 느이집으로 가라 등 떠미신 분이 아버님이시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 궁금하신 아버님이 두바이에 오신 적이 있다. 갑갑증이 나서 오신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 가신다는 것을 겨우 만류해 한 달 가량 함께 보냈다. 떨어져 있을 때는 모르지만 함께 있다 보면 허물이 보이기 마련이다. 특히 시어머니 눈에는. 오신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시어머님 눈에 뭔가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메누리 너한테 고맙다. 아들이 아무리 부모 초대하고 싶다 해도 너가 반대했으면 우리가 여기 올 수 있었가디? 엄마한테는 일절 잔소리 말라 했다. 메누리도 딸처럼 대하라고 했다.”



어머니가 잔소리 못하시게 입을 막으셨다. 시어머니는 그리 살가운 분은 아니지만 이제껏 나한테 싫은 소리 하신 적이 없다. (아버님 덕분이라 생각한다.) 귀국 하시기 전, 그동안 수고했다며 가져오신 돈의 절반을 용돈이라며 주시고 골드숙(금시장)에 들러 목걸이도 사주셨다. 



그 후 스페인에 머물 때도 다니러 오셨다. 그때도 귀국하시기 전에 용돈을 주시고목걸이도 사 주셨다. 남편이 저축한 돈으로 논을 살 때, 아내의 내조 없이 돈을 모을 수는 없다시며 공동명의로 등기를 내게 하셨다. 난생 처음 내 이름으로 된 땅을 갖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감사한 건 교회 다니는 내게 제사를 강요하지 않으신 점이다. 아버님에게 조상은 하나님과 같았고 제사는 너무나 중한 의식이었다. 큰아들이 제사를 이어받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하셨을 테지만 한 번도 내게 제사를 모시라 하지 않으셨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어머, 님은 복도 많으시군요. 세상에 이리 완벽한 시아버지가 어디 있을까요? 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점도 있으셨다. 불같은 성품이, 술 마신 뒤끝이 좋지 않으셨다. 시어머니를 대하시는 가부장적인 태도도 불편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버님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기본이두, 세시간 이었다. 매번 새로운 내용이면 좋았겠지만 대부분 같은 내용이어서 고역이었다. 그래도 늘 처음 듣는 것처럼 네, 네 하고 들었다. 한 번씩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묵묵히 들어드린 탓에 아버님은 내가 당신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아셨다. 



그렇지만 이런 단점들이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아버님에 대해 좋지 못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이 훨씬 더 많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사랑을 받았고, 존중을 받았다는 감사의 마음이 크다. 어쩌면 시어머니 돌보는 일에 크게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게, 아버님에게 받은 사랑의 갚음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버님 돌아 가신지 2년이 지났다. 친 아버지는 아니지만 한 번씩 그리운 맘이 든다.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아버님을 떠올리며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을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아버님을 기억할때 사랑 받았고, 존중 받았다는 생각이 떠 오르는 것 처럼 나도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떠오르면 그리운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하며 존중하며 귀히 여겨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