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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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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BY 귀부인 2022-04-09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
뙤약볕 아래 할머니 한 분이 고추밭의 풀을 뽑고 있다. 저 멀리 밭이랑 끝에서 말쑥한 얼굴을 한 할아버지가 
점심때가 다 되었다고 자꾸 집에 가자고 어린아이처럼 보챈다. '아직 점심 먹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하는데....'  라고 혼잣말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키 큰 고춧대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잠시 후, 초록 고춧잎 사이로 새하얀 수건이 일어서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진다. 도무지 농부처럼 보이지 않는, 하늘색 잠바에 하얀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짜증난  목소리를 높인다. 새하얀 수건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할머니가 얼굴에  주렁주렁 매달린 땀을 닦으며 일어 서는가 싶더니  허리가 꼬부라진다. 이내 거의 90도나 꺾인 허리를 천천히 펴며 아련한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본다.



' 아이구 영감탱이 왜 자꾸 어린애처럼 보채신데요.'라는 얼굴 빛이 아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다. 여느 시골 할머니처럼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이지만 왠지 모를 품격이 엿보인다. 할머니는 짜증은 커녕 늘상 있어 온 일인듯 온화하게 웃는다.

"아, 그라이까네 집에 가만 계시라 했더니 와 나오셨능교?"

"내 혼자는 심심해서 안그카나. 백날 일만 하면 뭐하노? 이제 일 그만 하고 내캉 놀러나 댕기야지."



깊은 산 속, 작고 오래된 흙 집은 집주인의 정갈함이 곳곳에 드러난다. 빗질 자국 그대로인 흙 마당 가장자리엔 아무 걱정 없는 예쁜 꽃들이 울긋불긋 제 색깔을 자랑 중이다. 마루 끄트머리에 앉아 채마 밭으로, 부엌으로, 수돗가를 오가며 점심을 준비하는 할머니의 뒤꽁무니를, 눈길로 쫓아다니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평화롭다.



이들의 사연은 이랬다. 할머니 19살, 할아버지 17살에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을 하였다. 중매쟁이가 나이는 어려도 건실한 청년이고, 재산도 있는 집안이니 시집가서 고생은 안 할거라 했다 한다. 그런데 결혼을 한 다음날부터 할아버지는 드러 누웠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늑막염을 앓고 있었는데 얼마 살지 못한다 했다. 요즘이야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깊은 산골에 사는데다 , 변변한 약하나 해 줄 수 없는 살림에 어떻게 해 볼 방법도 없이 죽어가는 아들을, 총각 귀신만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시부모님의 간곡한 부탁에 중매쟁이는 그만 거짓말을 하고 만 것이다. 요즘 말로 사기 결혼을 당하신거다.



심성이 착했던 할아버지가 첫날 밤에 자기 병을 고백하며 미안하다고 펑펑 울며 자기도 살고 싶다 했단다. 가난한 살림에 병 깊은 남편까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하던 할머니는 드러내어 울지도 못하고 가슴만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그런데 어느날 부턴가 죽을 날만 기다리며 파리한 얼굴로 힘없이 누워있는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불쌍한 마음이 들 수가 없었다 한다. 



"내 무슨 일 있어도 당신을 살릴끼구마. 걱정 마이소."

그 날 이후 부터 할머니는 들로 산으로 다니며 몸에 좋다는 약초는 다 캐어다 정성껏 달여 할아버지에게  먹였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나, 곧 죽는다는 할아버지는 점점 기력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 하나에 딸 셋을 두었다. 그러나 늘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농사일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할머니는 자식들 건사하고, 농사일 하고, 시부모님 모시고 그 모든 일을 해냈다.


"하이고, 그 고상 말로 다 몬할낍니더. 내 손 한 번 보이소. 이기 어디 여자 손이니껴. 아픈 남편 대신해 가장 노릇 할라 카다보이 이래됐으이 이 손이 부끄럽지는 않소."

"원망요? 와  원망하는 맘이 안 들었을낍니꺼? 그랗지만 이기 마 내 운명이라 생각하고 그래 살았십니더."

"그라고 영감님이 이리 내 옆에 살아 기시는 것만으로도 내는 괘안소. 좋소."



풋고추와 호박잎 쌈, 고등어 한 토막, 오이 냉채, 쌈장이 놓인 밥상을 마주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점심을 드신다. 낮잠도 자지 않는지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더위에 한껏 늘어진 복슬개가 흙바닥에 배를 깐채 길게 혀를 늘어뜨리고 있다 . 반쯤 감긴 눈을 하고. 



결혼을 하기 전 어느 후배가 내게 물었다.

"언니, 사랑하면 떠 오르는 단어가 뭐예요?  하나만 골라 봐요."

" DREAM(꿈, 이상), PASSION(열정, 정열), UNDERSTAND(이해) " 


후배의 해석은 이랬다. 

"dream을 선택하면 아직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뜻이래요. passion을 선택하면 지금 현재 사랑하는 중이구요. understand를 택하면 이미 사랑을 해 보았다는 뜻이라네요."


그때 내가 무슨 답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지금의 내 답은 understand다.  사랑을 해 봤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해 주는 것이란 생각에서 말이다.



 가수 나훈아씨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라고 노래 했는데, 사랑은 '이것이다'라고  한마디로 정의 하기는 어렵다. 대상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할머니처럼 평생을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사랑도 있다.  



 오랜만에 혼자 조용히 산책하는 중에 오래 전 인간극장에서 보았던 어느 할머니의 사랑을 떠 올리며 지금 나는 누구를 사랑하나?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 사랑하고 있나?  그리고 무엇을(일,신념 등) 사랑하고 있나? 

차근히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