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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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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이길 수 없다


BY 귀부인 2022-04-04

 딸을 이길 수 없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딸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가끔씩 들 때가 있다. 딸과 거의 매일 통화를 한다며 이젠 친구 같고, 의지도 되고, 때론 상담자가 되어 주기도 한다는 친구의 말을 들을 때면 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들이 나를 서운하게 한다거나 소홀히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아들 둘이 있는데 우리 집은 큰 아들이 딸 노릇을 한다. 내 돈으로 한 번도 사 본적 없는 고가의 화장품도 척척 사주고, 어쩌다 만나면 엄마, 요즘 제 나이에 엄마랑 데이트 하는 사람 어딨어요라고 생색을 내며 영화관도 데리고 가고, 맛집도 데려가고, 스티커 사진도 같이 찍는다. 은퇴를 앞 둔 아빠의 노후 계획은 잘 되어 있는지,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이 있는지도 솔직하게 물어주는 든든한  큰 아들이 있다. 그리고 별 말은 없지만 속 정이 깊은, 보기만 해도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다정한 작은 아들이 있다.



  그렇지만 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교감을 나누기엔 한계가 있다. 더군다나 아직은 결혼 전이니 나와의 관계가 살뜰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지금과 같은 관계에 어떤식으로든 변화가 생길 것이다. 딸 같은 며느리를 얻고 싶은 건 내 욕심이고, 며느리는 며느리일 뿐 결코 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우리 시어머니를 봐서도 그렇다.

지난해 여름, 내 생활 모두 미뤄두고 시댁에서 몇 개월을 시어머니와 단 둘이 보냈다. 코로나 때문에 바깥 생활이 많이 제한된데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시골에서 시어머니와 단 둘이 보내는 일은 익숙해졌다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센터에 가고 안 계신 낮  동안엔, 관심없던 인문학 강의도 들어보고 책도 읽고 했지만 하루는 길었다.



  당신 아들 혼자 있으면서 밥 굶을까 걱정되고, 낮 시간 동안 혼자 있는 며느리한테 미안하기도 하셨는지 어머니는 정신이 드실때면 빨리 늬이 집으로 돌아가라 성화셨다. 그러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어머니의

 딸이 왔다. 어머니의 반가워 하는 모습이란.... 


피붙이는 이런거구나, 어머니에게 딸은 이런거구나 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셨다. 딸의 손을 꼭 부여잡고 오느라 고생했다, 너는 어쩜 이리 피부가 하얗니, 애들은 잘 있니, 늦은 시간에 왔는데 배고프겄다 하시며  

며느리인 나에게 얼른 밥 차려라 재촉 하셨다. 오랜만에 딸을 만난 반가움에 두서없는 말들을 늘어 놓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엔 나 한테  한 번도 보여 주신 적 없는 한 없는 사랑의 미소가 넘쳤다.



  아무리 가까이서 돌본다 한들 전화를 자주 하지도, 일 한다며  자주 찾아오지도 못하는 딸을, 며느리인 내가 절대로 이길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한테 살짝 서운한 맘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이 

천륜인데 어쩌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시어머니는 친정 엄마가 아니고, 시어머니에게 나는 딸이 아닌 것을.... 


어머니는 딸 앞에서 그 어느 때 보다 편안해 보이셨다. 마치 어린아이가 제 편을 만나 기가 살아난 것처럼 목소리에도 힘이 넘쳤다.  경증 치매를 앓으시는 어머니께서 그동안 어떻게든 며느리 앞에서 정신줄 놓지 않으려 애쓰며 긴장하고 계셨구나 싶은 생각에 한편으로 짠 하기도 했다. 



   수년 전 돌아가신 친정 엄마 생각이 난다. 친정에서 나는 막내라 언니, 오빠들 믿고 살뜰히 챙겨드리지 못했다.더군다나 해외에 사느라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다. 한 번씩 한국에 들르면 언제나 시댁이 우선이라 엄마를 뵙는 건 겨우 하루, 이틀이었다. 내 손을 덥석 잡고 반가워하시던, 보는것 조차 아깝다는 듯 대하시던 친정 엄마의 모습이 시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시어머니한테 하는 것 반 만이라도 친정 엄마한테 해드렸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프다.



  아직 결혼 계획이 전혀 없는 큰 아들이  딸처럼 엄마를 살갑게 챙겨주진 못하겠지만, 아쉬운대로 딸 노릇을해 줄 것이고, 정 많은 작은 아들도 말없이 엄마를 챙겨 줄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는 결혼을 할테고.  

결혼 하고 나서 더 끈끈해진다는 엄마와 딸의 관계와는 달리, 며느리의 남편으로 살아가야 할  아들들과는 자연히 거리감이 생길 것이다.



  결국 내 옆에 남을 사람은 오직 남편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남편 더 잘 챙겨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남편 옆으로 가 슬그머니 손을 꼬옥 잡았다. 흠칫 놀라며, 

"응, 무슨 일이야? 갑자기 뭐야? 뭐 잘못한거 있어?"

"무슨 일은 .내가 뭐 어린애야? 잘못할게 뭐 있어? 그냥 당신 좋아서어." 


코맹맹이 소리에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 보던 남편이 씨익 웃으며  다시 TV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연애 때 가졌던 찌릿함은 없었지만 살아온 세월만큼 쌓인 정이 느껴지는 따듯한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