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간해서는 낮잠을 자지 않는다. 아니, 밤의 단잠을 위해서라도 낮잠은 자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그런데 요새로 다친 영감의 수발이 힘이 들었는지, 어제는 슬그머니 낮잠이 든 모양이다. 것도 장장 두어 시간을 잤나 보다. 일어나니 2시가 지나가고 있다.
비가 오시려나? 자고 났는데 몸이 깨운치를 않다. 점심시간도 지났으니 누운 채로 딩굴딩굴.
3시가 지나도록 그러고 있다. 영감은 그림처럼 TV하고만 마주 앉아 있다. 화면이 구멍이 날 지경이다. 허긴. 저 몰골로 뭘하겠는가. 보채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지.
그런데 허기가 진다.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나?'
그러고 보니 점심밥을 먹은 것도 같고, 아니 먹은 듯도 하다.
"여보. 우리 점심 먹었어요?"
영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심하다는 듯 말한다.
"혼자 먹었나 보지."
"아니, 그럼 우리 점심 안 먹은 겨?"
화들짝 놀라 일어서서 시계를 보니 3시 30분. 서둘러 밥을 앉히며 중얼거린다.
"아니, 밥 달라 소리도 못해요?" 밥을 챙겨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말없이 앉았는 영감만 나무란다.
'치매 아녀?' 밥을 먹고도 안 먹었다고 우기는 것이 치매의 시작이라더니,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는 것도 치매겠다. 그래. 요사이로 내가 좀 이상하긴 했지. 잘 둔 물건도 둔 곳을 잃어버리기 일쑤이고, 받은 물건도 안 받았다고 곧잘 우기기도 한다. 오늘 다녀온 길도 어제였다고 우긴다.
에어컨의 리모콘으로 TV화면을 켜려고 하지를 않나. 조금 전에 먹은 약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헤어드라이기에 전원을 연결하고는, 족욕기가 먹통이라며 고장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커피포트의 물때를 제거하느라고 구연산을 넣고 끓이다가, 그 물로 영감의 커피를 타서 먹이기도 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건 기억에 없다. 할 수 없이 작은방의 벽 한 켠에 장식대를 세우고 모조리 채운다. 약봉지에는 일일이 날짜를 기입하고, 그것도 못 믿어워서 개봉한 약봉지만 따로 모아넣고, 미심쩍을 때는 재차 확인을 한다. 이제 밥 먹는 일까지 기억을 못하니, 끼니마다 벽에다가 동글뱅이를 그릴꺼나? 아직 이래선 안 되는데. 만석이 큰일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