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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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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비


BY 이루나 2021-03-09


 

 곱게 단장을 하고 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현관 앞에 우두망찰 서서 비가 내리는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올라가서 우산을 가져올까아니면 그냥 몇 발짝 차가 있는 곳까지 뛰어갈까아파트 9층에서 베란다를 거쳐 내다보면서 비가 내리는 걸 미처 몰랐다촉촉이 소리 없이 내리는 비였다아주 어릴 적 루핑으로 만들어진 지붕 아래 살 때는 모를 수가 없었다투 툭투 투 투 툭아무리 얌전히 와도 알 수 있었다보슬비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이 들기도 했었고 요란스레 내리는 소낙비 소리에 놀라 어슴푸레 잠을 뒤척이기도 했었다

 

 기후변화 탓일까어릴 적엔 이르면 6월에서 9월쯤 규칙적인 장마철이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장마철을 뚜렷이 느끼지 못하는 현실이다장맛비가 시작되면 후드득 소낙비가 내리다 뚝 그쳐 버리는 일이 자주 있다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그해 여름도 장마기가 시작되면서 잦은 소낙비가 내리더니 큰비가 되어 우리가 살던 마을을 휩쓸고 간 대 홍수가 난 일이 있었다그날은 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 소리가 온종일 시끄러웠다초저녁이 되어 야트막한 문지방 아래까지 넘실대며 흘러가는 물을 보며 어른들은 걱정에 싸여 있었는데 초저녁잠이 많은 우리 남매는 잠이 들었다얼마를 잤을까누군가 흔들어 깨워 눈을 떴더니 이불 보따리와 솥단지를 챙기신 아버지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잠에 취해 눈을 비비는데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꽹과리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놀라서 아버지를 쳐다보니 동네 이장과 청년들이 피난 가라고 소리를 질러가며 마을을 돌고 있으니 얼른 따라나서라며 재촉하셨다가장 어린 막내를 둘째 언니가 업고 쌀과 이불 보따리를 들은 어른들을 따라 집을 나와 신작로를 건너 언덕 위에 있는 이발소 집으로 피난을 하였다이발소는 졸지에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지만 나는 구석을 찾아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니 한잠도 못 잔 어른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발아래 마을을 굽어보니 신작로 아래 야트막한 마을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있던 마을은 지붕만 겨우 보이고 물은 그곳이 마치 원래 강이었던 양 마을을 가로질러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아버지는 가마니째 가져다 놓았던 쌀이 다 떠내려갔을 거라 애석해하면서 그래도 마을 주민 모두가 피난했으니 다행이라 했다. 3일 만에 물이 빠지고 아래로 내려가니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집에는 남아 있는 살림살이가 거의 없었다진흙을 퍼내 가며 건져낸 건 수저 몇 개와 흙 속에 파묻힌 채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 굴러다니는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걱정하던 쌀가마니가 그대로 있기는 했지만 먹을 수는 없었다입은 채로 허겁지겁 집을 버리고 목숨만 건진 사람들은 식량도 옷도 없었고 마을로 들어오던 다리조차 끊겨 아무것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을까타 타 타 타하늘에서 나는 헬기 소리에 마을 주민들이 몰려들었고 저 먼 하늘에서 마을로 무엇인가 떨어지고 있었다구호 물품이었다어른들이 달려들어서 상자를 풀자 쌀라면헌 옷다이얼 비누 등이 쏟아져 나왔다배급받은 구호 물품과 냉수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내는 중에 장마가 휩쓸고 간 마을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체한 것같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프면서 어지러웠다노 오란 얼굴로 어지럽다는 나를 업고 아버지는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원에서는 체했다며 엉덩이에 주사를 놔 주었는데 주삿바늘을 빼는 순간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아주 먼 곳에서 희미하게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후 정신이 드는 것을 지켜 보고 있던 의사는 너 때문에 놀랐다며 혀를 끌끌 찼고 아버지는 아이가 허약해서 의사 선생님을 걱정시켜서 죄송하다며 의사와 간호사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버지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보건소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집 집마다 뒤져서 누워있는 환자들은 죄다 싣고 보건소로 데리고 갔다도착하니 보건소에는 마당까지 천막을 쳐 놓고 환자들이 누워있었다중한 환자들은 보건소에 남겨지고 나는 집으로 돌려보내 졌는데 그 후로 두어 달을 더 자리에 누워 지냈다

 

 안락했던 루핑 지붕 아래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리고 환자까지 생겼으니 비가 내리면 큰일이었다행여 소낙비라도 내린다면 허술한 천막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이다모든 것을 잃고 허허벌판에 남겨진 사람들은 정부에서 쥐여주는 몇 푼의 돈으로 집을 짓기엔 턱도 없었지만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추워졌고 닥쳐올 겨울을 준비해야 했다아버지는 다시 집을 짓기 시작했다산에서 나무를 잘라다 기둥을 세우고 흙벽돌을 찍어가며 구슬땀을 흘리시더니 또다시 루핑 지붕을 덮어 올렸다타 탁투 투 투 툭우리는 다시 루핑 지붕 아래서 잠이 들었고 밥을 먹었고 울고 웃었다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가난의 상징 같은 루핑 지붕 아래서 함께 들었던 빗소리를 언니들도 기억할까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세상에서 가장 따듯하고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곳이었던 루핑지붕 아래에서 들었던 그 소리 때로는 시끄럽고 듣기 싫은 소음이었다가 때로는 잔잔한 음악이기도 했던 그 소리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빗소리를 들으며 자라던 아이는 언제부터인지 그 소리를 잊어버렸다.
빗소리를 전해주던 지붕이 단단한 시멘트로 바뀌면서 덩달아 아이도 단단한 어른이 되었지만그 속엔 늘 아이가 함께 있었다.
 숙녀가 되고엄마가 되고 어머니가 된 지금까지도 내 안엔 항상 소녀가 산다오래전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두 눈을 반짝이던 소녀에게 많은 영감과 상상을 하게 해 준 자연의 소리 들을 이젠 아주 가끔 밖에 듣지 못한다.
 시멘트로 겹겹이 발라져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아파트 천장에선 생활 소음만 가득하다빗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콘크리트 속에서 가끔 어릴 적 기억들을 건져 올려서 회상한다
 비 오는 날 땡땡이 원피스에 빨간색 장화를 신고 우산을 받쳐 든 부잣집 딸이 너무나 부러웠었다우산도 없고 장화도 없는 것에 대한 반항으로 비를 잔뜩 맞은 채 쏘다니다가 생쥐 꼴로 돌아가 처량한 몸짓으로 측은지심을 동정해 보려던 나의 어설픈 행동이 오히려 어머니의 화만 돋우었다소낙비가 내리면 어딘가로 피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천방지축 그 비를 다 맞고 다니는 천둥벌거숭이라 했다어른이 되어서도 어쩌다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에 온몸이 젖어 들 때면 그때가 생각나서 혼자 웃는다어머니가 비에 젖은 아이를 깨끗이 닦아서 품에 안고 당장 달려가 빨간색 장화와 노란 우산을 사 줄지도 모른다고 아이는 상상했었다아이의 상상 속 동화는 한 번도 아이의 생각처럼 완성되지 못했지만 날마다 행복한 동화를 꿈꾸면서 아이는 자랐다어른이 되어서도 늘 멋지고 행복한 드라마를 꿈꾸어 보지만 현실은 자꾸 어긋나기만 했다.
 늘 어긋나고 만족하게 완성되지 않지만 나는 매번 행복하고 아름다운 동화를 상상하고 기대한다아직도 나의 동화는 이리저리 궁리하고 수정하면서 채색 중이다가랑비가 내리면 미 파 솔 라 솔 미도 노래하던 아이가 있었다소낙비가 내리는 날이면 루핑 지붕을 때리던 요란한 빗소리를 피해 자주색 캐시밀론 이불 속으로 숨어들던 12살 계집아이가 내 안에서 자박자박 걸어 나오며 배시시 웃는다.
 소낙비로 회상된 기억을 가만히 접으며 차까지 뛰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트렁크에 노란 우산은 아니지만소낙비를 너끈히 받아줄 우산이 있지 않은가아니 어쩌면 우산을 꺼내기 전 그칠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