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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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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삐에로가 된다


BY 만석 2020-11-17

이제 만보걷기는 나에게, 아니 내 나이에는 무리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던 나는, 기가 죽어서 서성거린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못하고 안방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건넛방으로 돌아오는 게 고작이다. 같아 사는 식구는 알량한 영감 뿐인데, 이 영감은 말하다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하루 종일이 다 가도 입을 떼지 않는다. 내가 묻는 말에나 단답형 대답을 하는 위인인데, 나마저 기분이 처져서 입을 닫으니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너무 무려해서 내딛는 내 발걸음을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안방을 거쳐 거실을 지나 건넛방으로 돌아오니 체 오십 걸음이 불원하다.  남에게 싫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내 영감이라는 위인이, 빌려 준 원금을 잊어버릴만 할 때에, 어찌 어찌하여 대신 이 집을 꿰차라는 친구가 고맙다고 했고, 나는 그래도 아직 영감에게  이런 패기가 남았나 싶어서, 반가운 마음에 이것 저것 둘러 볼 새도 없이 이사를 하지 않았겠나.

식구 둘이니 방 셋이 좁지는 않을 것이라 이구동성 입질을 하기에, 좋지는 않았지만 방 다섯 칸에 늘어놓았던 짐을 구겨 넣으니, 처음에는 살기가 참 팍팍하더구먼.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 그리고 버려졌던 쩐을 이렇게라도 찾은 게 어디냐고 반가운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방도 방이지만 주방이 좁아서 큰일에 두 며느님을 세워 놓을 수가 없어서 난감하기도 하더라만.

그런데 시방 만보걷기를 집안에서 좀 시늉이라도 해 보자 하니 갑갑하고 답답하기가 그지가 없구만. 다른 방법을 좀 찾아 보아야겠다. 내가 시방 꼭 해야 할 운동이 만보걷기 뿐이더냐. 반드시 다리운동만 해야 할 이유가 뭐람. 좀 더 건설적인 운동을 찾자. 그러고 보니 내가 많이 나태해졌다. 여기에서 풀어놓으면 내 자랑이 되겠으니, 긴 세월을 그냥 부지런히 살았다고만 해 두자.

어느 날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 너 인터넷 잘 하냐?"
"???" 도대체 이 할마씨가 지금 무얼 묻는 것인지 간파를 하지 못하겠다.
"컴퓨터 배우러 다니자." 그러고 보니 내 나이의 늙은이들은 컴을 잘하는 이들이 별로 없지.
"복지관에서 무료로 가르쳐운단다. 난 요새 손가락 마디가 뻣뻣하다. 손가락운동 삼아 배우자."

나보다 두 살이 많은 그녀는, 그런데 내가 보아도 나보다 댓 살은 더 먹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녀를 내 거울로 삼았다. 이마에 주름이 선명해지면,
"나도 곧 저렇게 되겠지." 라고 예산을 하고,  요새로 무릎이 새큰거린다 하면,
"내 무릎도 곧 저렇게 될 거야."했다. 그런데 이제 손가락이 뻣뻣하다 하니, 나도 머지않아 그리 되겠지 싶다.

손가락? 그럼 손가락운동을 해? 허긴. TV에서도 손가락 운동을 자주 하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나는 아직 손가락은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아하~. 컴퓨터 덕분인가? 그렇겠다. 그러고 보니 따로 손가락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그럼, 자주 드나들며 이 알량하고 꼴난 글 솜씨를 더 열심히 펴 봐봐? 손가락  운동 삼아서? 젊은이들이 싫어하면 어째?!

아니지. 듣기에 좋으라고 하는 소리일지라도 '건강하셔서, 재치 있고 귀감이 되는 글을 오래 오래 써 달라.'고 하지 않던가. 역시 듣기에 좋으라는 말이지만, 나는 제 멋에 겨워 혼자 웃어본다. 말이란 참 묘한 구석이 있다. 사람을 이처럼 바보로도 만들고, 그래서 나 같은 바보를 '제 잘난 멋'에 살게도 한다. 하여 곧잘 삐에로를 만들기도 하지. 허긴. 늙은 이의 입담도 때로는 들어 볼만한 길잡이가 되는 때가 있긴 하지. 오늘은 갑자기 무슨 덫이 씌였는지 쓰잘데기 없는 말을 많이도 한다. 그러게 나는 오늘도 잠시 삐에로가 되어 떠들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