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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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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살아요.


BY 이루나 2019-12-07

10대 후반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가본 서울은 그야말로 별 천지였다.
언니의 혼수 준비를 위해 현금을 보자기에 둘둘 말아서 허리춤에 찬 엄마의 호위병으로 따라 나선 참이었다. 우리는 많은 현찰을 지녔으니 네가 엄마를 잘 지켜야 한다. 옆에 붙어서 계산 할 때 혹시 셈이 틀리지 않는지 바가지를 씌우지는 않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 서울 것들은 무섭다더라. 눈 감으면 코도 베어 간다는구나! 어머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엄마만큼이나 불안했던 나는 연신 코를 벌름 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었다. 꼬리를 물고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과 최신 유행으로 무장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서울의 풍경에 기가 눌려 정신없이 눈을 굴려댔다. 잠시 숨을 돌리고 보니 화려하고 유혹적이긴 한데 무척 피로한 도시였다. 전철에서 내리면 누군가 휘슬이라도 불어 준 것처럼 일제히 앞을 향해 뛰어간다. 주위를 둘러 봐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뛰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곳은 내가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88년도에 처음으로 와 본 춘천은 고적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공지천의 팔각정을 가보니 호수와 어우러진 경치가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
필사적으로 뛰는 사람들도 없었고 말투는 느릿했다. 이곳에서 살아야지 작정했다.
춘천에서 살기 시작한 몇 년 후 어느 날 세상이 싫어지는 아침 이었다.
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가을 햇살이 아름다운 날 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아저씨가 추천하는 드라이브 코스가 있냐? 물으니 주저 없이 출발한다. 그림 같은 의암호를 돌아 한참을 달리더니 서면으로 접어들었다. 강 옆으로 갈대가 흔들리는 한가로운 들녘이 펼쳐지고 강 건너 저 너머로 가을 햇볕이 내려 쬐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여기서 내려 달라고 하자 멀뚱히 나를 쳐다보는 기사님에게 여기가 맘에 든다고 하며 웃었다. 그 날 이후 의암호를 돌아 서면으로 한 바퀴를 도는 드라이브 코스는 우울 할 때 나를 위로 해주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40대 중반의 어느 날 이었다. 그 날은 나의 모든 것이 끝나도 좋다고 생각 했었다. 집을 나와 어디를 갈까? 망설이다가 늘 가보고 싶었던 삼악산을 선택했다. 처음으로 올라가는 힘든 산행에 땀과 눈물이 함께 쏟아졌다. 악산인 탓에 발밑을 보느라 정신없이 올라가다가 잠시 숨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호수위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웠다는 시처럼 나도 살아가다 보면 오늘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숨을 고르고 난후 땀을 핑계로 눈물까지 훔쳐내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호수위에 떠 있는 붕어 섬 을 내려다보니 힘들게 올라온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기막힌 풍경이 거기 있었다. 이겨내고 극복하면 언젠간 나도 오늘을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날 나의 선택은 최고였다.
그 후로 나는 힘들면 산에 오르는 습관이 생겼다. 결정하기 힘든 난관에 부닥칠 때, 혹은 세상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 삼악산도 오르고 드름산도 올랐다. 때로는 문배마을의 산마을 경치와 동동주에 취해 보기도 하면서 나를 다독였다. 가끔은 혼자 대룡산에 올라 폭포를 찾아 신선놀음도 해 보았고 호수를 품어 안은 자연에 취해 되지못한 시를 쓰면서 마음의 사치를 한껏 부려보기도 했었다. 공지 천 둘레 길을 걸으며 호수에 비친 달빛을 교교히 바라보는 나무들에게 눈 맞춤도 해주면서 31년을 그렇게 보냈다. 호수와 산을 품어 안은 삼악산, 강과 호수가 만난 서면의 둘레 길, 물 햇살이 반짝반짝 빛나는 소양호와 청평사길 이 모두가 나의 오랜 친구이다.
나를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따듯이 품어준 아름다운 자연에 감사하면서 온 몸으로 계절을 느낄수있는 춘천에서 나는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