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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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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라고?


BY 한이안 2016-03-31

어제 아침 6시,

전화벨이 울려 투덜거리며 일어나 전화기를 가방에서 꺼낸다.

열어보니 옆 집 할머니시다.

"할머니, 왜?"

"자는 사람 깨워서 미안혀."

할머니는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신다.

난 이미 깨어있던 터라 괜찮다고 거듭 말한다.

"좀 와 줄 수 있어? 전기밥솥을 샀는데 아무리 취사를 눌러도 밥이 안 돼."

난 알았다는 말을 남기고  얼른 옷을 챙겨입은 후 밖으로 나선다.

 

할머니는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부엌에는 새로 산 압력밥솥이 놓여있다.

난 주저앉아 압력밥솥을 살핀다.

한데 눈이 가물가물하여 글씨가 제대로 안 보인다.

할머니한테 돋보기 좀 달라하여 귀에 걸기 무섭게 글씨들이 환하게 다가온다.

84세이신  할머니의 시력과 내 시력이 얼추 비슷한 모양이다.

 

글씨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는데 할머니가 설명서를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읽어보니까 가스 옆에는 놓지 마라!  뭐 옆에는 놓지 마라! 등등 해서 하지 말라는 말만 죄 있는데 그걸 다 기억할 수도 없고......

할머니는 기억할 수도 없는 말들만 잔뜩 늘어놓은 설명서가 원망스럽다.

난 그 와중에도 그건 회사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빠져나가기 위해 써놓은 거라고 말한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나오신 할머닌 내 말을 바로 알아들으신다.

 

살펴본 결과 메뉴를 먼저 선택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빼먹으신 게 작동이 안 된 이유였다.

이전에 쓰던 것과 같은 회사 제품이라 생각하여 해오시던 대로 취사만 누른 게 탈이었던 거다.

메뉴를 백미로 선택하고 취사를 누르니 작동이 되기 시작한다.

"맞아 이거야. 이렇게 돼야 하는 거야."

할머니의 근심이 얹혀 있던 목소리에 단박에 생기가 얹힌다.

 

난 취소를 하고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설명을 해드리고 출근하실 할머니를 생각하여 일어나려 한다.

한데 할머니가 미덥지 않은 눈치를 자꾸 보이시며 말을 이으신다.

확인을 하는 것까지 봐주셨으면 하는 듯했다.

난 할머니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밥이 되기를 기다린다.

 

밥이 되자 할머니가 뚜껑을 여신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이 눈에 쏙 들어온다.

"밥 잘 됐네, 할머니."

할머니가 주걱으로 밥을 저으신다.

그러더니 한술 떠서 내게 내미신다.

"먹어 봐!"

"맛있어, 할머니."

 

난 달짝지근한 밥을 씹으며 할머니 집을 나온다.

도시락까지 싸서 육묘장 출근시간에 맞추려면 할머니도 준비할 시간이 빠듯할 거 같아 할머니를 붙잡고 한없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요즘 가전제품들은 업그레이드 시키는 데만 신경을 쓴다.

연세 있으신 분들을 생각하여 기능이 단순한 제품도 좀 만들어내면 어떨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