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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이 쓰는 편지(3)


BY 편지 2014-09-29

마을버스는 한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도로에 나를 내려준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건너면 그 길부터는 재래시장이 있다.

첫 번째 모퉁이에 다이소 매장이 있고,

그 다이소인지 다있소인지 매장을 끼고 돌면 철로 만든 계단이 나온다.

철 계단 밑에 세모꼴 화단이 있다.

봄엔 풀만 씩씩하게 자라던 곳이었는데

여름이 막 올 때쯤 시골 울밑에 흔하게 피는

분꽃,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꽃모종이 심어져 있었다. 잠깐 누가 심었을까? 고마워했다.

세모꼴 화단을 내려다보며 철 계단을 탕탕탕탕 올라가면,

제법 넓은 주차장이 돗자리처럼 시원하게 펼쳐져있고

이 주차장 주인인 3층짜리 하얀 건물이 보인다. 이 곳이 내가 일하는 곳이다.

주변의 집들처럼 오래된 건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공기관이라

안은 깨끗하고 편리하게 수리가 돼있다.

층층마다 냉온수기가 놓여있어서

요즘 물 많이 먹기가 유행인데 물을 2리터씩 마셔도 누가 뭐라 그럴 사람이 없다.

겨울엔 뜨거운 물로 손을 열 번씩 씻어도 온수요금 낼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일은 많이 바쁘지 않다.

나이든 분들이 이용하는 곳이라 그 분들 비위를 맞추기가 조금 힘들 때도 있지만

먼저 인사를 하고 밝게 대하면 무표정했던 얼굴에 표정이 생긴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괜찮은 사람과 안 괜찮은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이루어져있다.

나랑 잘 맞으면 괜찮은 사람이고, 나랑 잘 안 맞으면 안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거고,

이상한 사람은 그냥 받아들이든지 모르는 척 안 그런 척 대하면 된다.

 

내 옆엔 괜찮은 사람이 한명 있다.

첫째, 어려운 일은 먼저 하려고 한다.

둘째, 언제나 밝고 긍정적이다.

셋째, 남의 실수를 감싸준다.

넷째, 같이 일하는 사람과 잘 지내고 윗사람에게도 잘 한다.

다섯째, 칭찬할건 칭찬할 줄 안다.

       

내 옆엔 이상한 사람이 한명 있다.

첫째, 인사를 해도 대충 받던지 외면을 한다.

둘째, 하루 종일 우울한 사람이다.

셋째, 하루 종일 투덜거린다.

(이유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작은 실수를 하면 투덜거리며 미워한다.)

넷째, 실수를 제일 많이 한다.(큰 실수도 많이 한다)

다섯째, 윗사람에겐 김밥을 잘 만다. 같이 일하는 사람을 깔아뭉갠다.

 

이상한 사람이 나에게 이상한 짓을 하면 그 앞에선 아무 말도 안하고

찬물을 한 컵 받아 밖으로 나온다.

뒤뜰을 한 바퀴 돈다. 뒤뜰엔 그닥 볼 건 없다.

볼만한 나무는 건물보다 더 오래된 몇 그루의 은행나무.

은행나무를 보면서 물 한 컵을 마시고 다시 제자리를 돌아오면 오 분 정도 걸린다.

 

나는 아이 둘을 한참 키워야 할 때 미치도록 불행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어 기쁘다.

다시는 웃지 못 할 줄 알았는데, 난 다시 웃게 되었다.

이상한 사람이 옆에 한명이 있다 해서 기쁘지 않을 게 없다. 웃지 않을 것도 없다.

난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은 사람과 호흡을 맞춰 내 주어진 일을 하면 된다.

 

철계단을 밟으며 퇴근을 한다.

탕탕 두 번 내려가면서 세모꼴 화단을 본다.

샌 노랑과 진분홍색이 섞인 분꽃은 양산 같구나.

맨드라미 꽃잎으로 소꿉장난을 했었어. 물에 담가서는 김치라며 먹는 시늉을 했었지.

집집마다 봉선화 꽃을 심었어. 봉선화 꽃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지 아마?

탕탕탕 세 번 내려가면서 꽃잎을 자세히 본다.

백일홍 꽃은 어두컴컴한 바보네 집에 정말 많이 심어져 있었거든.

여름이면 집둘레에 백일홍 꽃이 한꺼번에 피면 어둡던 집이 유리 집처럼 환해졌었어.

동네에서 바보네 집이라 불렸던 그 집을 나는 백일홍네 집이라 불러줬어.

자세히 보니 나팔꽃도 있었네. 나팔꽃 길을 만들어주지 않아 바닥을 기며 피어있었다.

그래 뭐, 길이 없으면 길을 개척해가면서 살면 되잖아.

 

다있소 매장을 빠르게 지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처음으로 이 동네로 출근을 할 땐 옷가게였는데, 커피 집으로 바뀌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이 맘에 들어 입어보겠다고 했더니

옷가게 점원은 나한테 맞지 않겠다며 벗겨주지 않았다. (한 벌밖에 없었다.)

마네킹여자가 오오사이즈가 아니냐고 했더니 맞단다.

나도 오오사이즈 입는데요, 했더니 옷가게 점원은 나한테 맞지 않는다며 벗겨주지 않았다.

그러더니 얼마 안 있어 옷집은 문을 닫고 커피집이 들어섰다.

폭 좁은 긴 골목 같은 커피 집 . 꼭 이 동네를 닮아있었다.

커피 값도 싸다. 차가운 거든 뜨거운 거든 천오백원이란다. 두 번 사먹어 봤다.

저기 내가 탈 버스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