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마당에서
암 정기검진을 받기 위하여 경북대 병원 본원에서 칠곡 암 센타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창가에 앉은 나는 5분 후면 떠날 차장 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택시에서
내린 한 젊은 사람이 바쁘게 서두러며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내려놓는다. 휠체어에 탈
주인공이 누굴까 잠간 사이지만 궁금했다.
택시 뒷 칸으로 가더니 사람을 안고 나온다. 한눈에 알아 볼 만큼 젊은 사람과 꼭 닮은
노인분이다. 피골이 상접한 깡마른 체격 하얀 양말이며 새 옷인 듯 깨끗한 옷차림이
간호하는 분의 정성이 보인다. 어린아이를 안 듯 아버지를 안고 휠체어에 앉힌다.
아버지는 오른 팔로 아들의 목을 감고 자신의 온몸을 맡긴 아들을 근심스러운 듯
쳐다본다.
까닭 없이 눈물이 흐른다. 사십년도 훨씬 전에 가신 내 아버지의 모습 바로 그
모습이다. 어려운 살림에 대 가족의 생계를 한 몸에 짊어진 아버지께서는 온몸의
진을 다 빼 놓고 가셨다. 뼈인지 살인지 장작개비처럼 불을 댕기면 금방이라도 훨훨
타 버릴 듯 한 깡마른 육체에는 물을 넘길 목구멍 까지 막힌 듯 물 넘기는 것조차
힘들어 하시던 마지막 그 모습을 지금 나는 보고 있다.
오십을 갓 넘긴 아버지께서는 팔 구십 노인의 모습으로 저 세상에 가셨다. 아버지를
힘들게 하는 대는 나도 한 몫을 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나를 부르시더니
가정형편을 설명하시며 도저히 진학을 시킬 수 없다고 하시며 입학을 못 하도록
간곡히 말려셨다. 입학 등록을 못한 나는 일 년 내내 울었다. 그리고 계속 공부하여
그 이듬해에도 합격을 했다.
할 수없이 입학을 시켜주신 아버지께서 모든 걸 줄일 수 밖에 없었다. 농사가
천직이었던 그 시절 출근 퇴근시간이 따로 없었다. 잠자는 시간 이외는 일을
하셨다. 근검절약 그 모습부모님 공경과 자식사랑이 남다르셨던 아버지,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께선 시골 5일 장에 가시면 할아버지께 드릴 소주와 우리에게
줄 그 귀한 카스테라를 장날마다 왜 사 오셨을까? 정작 당신은 때를 놓쳐 오후
3시쯤 오셔서 밥을 청하시던 모습이 눈에 생생하다.
등록금 고지서가 나올 때 쯤 이면 영락없이 돈을 장만해 오시던 아버지 모습,
반에서 언제든지 손꼽힐 정도로 빨리 등록금을 내었다. 아이들은 내가 시골에서
좀 잘 사는 집 딸인 줄 알았다. 시골서 올라온 딸이 혹시나 기죽을까봐 아버지의
배려는 후의 내가 부모가 되어서 깊이 깨닭게 되었다. 부모님의 희생으로 평생토록
크게 돈 걱정을 안 하고 살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평생 월급쟁이로 살다가 노후엔
연금으로 생활하니 내 자식에게 까지도 아버지의 영향이 뻗힌다. 졸업 전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그 후 32년 직장생활은 나의 노후까지도 이렇게 탄탄하게 만들어 주시고
가셨다.
월급을 타서 아버지께 드리면 그 돈을 고스란히 모아주시던 아버지, 나의 용돈은
아버지가 별도로 주셨다. 돈 안 번다고 생각하고 몽땅 적금을 넣어 시면서 너
결혼할 밑천이다. 하시던아버지께서는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시고 저 세상에
가셨다. “기시고기” 나의아버지의 대명사다. 부잣집 딸인 엄마에게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아버지의 참 사랑을 엄마는 두고두고 그리워 하셨다. 60도 못 사신
아버지의 생애,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던가?
나 또한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 내년이면 칠십이다. 잊고 산 듯 옛일 들이
주마등같이 떠오른다. 옛날 같으면 나는 벌써 땅속에 누웠을 사람이다. 의료
발달로 이렇게 멀쩡하게 중증환자의 진료가 6개월 후면 끝이 난다. 수술은 엄두도
못 내고 한약 양약 으로만 치료하다 집에서 가실 날만 기다리다 끝없는 고통 속
에서 가신 아버지, 자식이 되어 부모님께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기억에도 아물거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 왜 이리 내
가슴을 후비며 눈물이 날까?
시기를 놓쳐서인지 병이 깊은 노인임을 의사가 아닌 나의 눈에도 한눈에 판단이
간다. 얼마 남지 않는 마지막 모습, 아버지의 성품인지 자식들의 정성인지 깡마르긴
해도 깨끗한 피부 단정한 용모 머리도 손질을 한 듯 어느 한곳 흐트러짐이 없는
노인이시다. 아들은 다급하게 아버지를 휠체어에 싣고 병동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내 시아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