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햇무리가 스민 공원길을 지나면 버스 정류장이 나오고,
삼백 미터가 넘는 양쪽 도로가에 서있는 가로수는 느티나무들이다.
온통 초록으로 싸여있던 나뭇잎들이 단풍이 들어가는 중이라
빨강 노랑 주황 연두 초록 갈색. 꼭 색동저고리를 장만한 것 같다.
인간은 일만 육천 가지의 색깔을 구분할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주황과 빨강사이 연두와 초록사이 주황과 갈색사이의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색조가 어울리고 번져서 굉장히 오묘하고 아름답다.
텃밭 도서관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느티나무 가로수를 음악처럼 감상을 한다.
많은 차들이 오고 가지만 나는 느티의 음악에 취해 찻소리도 사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초록에서 갈색까지 변해가는 나뭇잎은 나와 자연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걸어가야 할 일상선이다.
봄에 피는 나무 꽃들은 몸이 가벼워 떨어지는 꽃잎에
난 너무 민감했고 그 민감함이 날 울리지만
가을나뭇잎이 두셋 잎씩 떨어질 땐 불현 듯 떠오르는 영화 속에 주인공이 되어
나뭇잎 사이로 허공을 보고 우수에 찬 눈으로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해본다.
이루지 못할 그 어떤 사랑에 목말라 쓸쓸해지고
그 사랑이 나를 못 잊어 같은 허공을 보고 있는 장면을 연출하며
정녕 이 가을이 이렇게 저무는구나! 아쉬움마저도 아름다운 그런 가을날의 정오.
외국 어떤 영화중에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고
한 시간 동안 하늘과 정원을 담았다고 한다.
환갑을 넘긴 이 노감독은 자기 집 정원에서 영화를 찍었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나도 아무도 없이 혼자 누구랑 전화통화도 하지 않고
느티나무 정류장에 서서 하늘과 나무가 이어진 두 가로수 길을
가을이 시작한날로부터 매일 영화를 찍었다. 그렇지만 결코 고독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감상하고 참아 낼 수 있다면 오늘 하루도 아름답고 풍성한 선물인 것이다.
요즘 나는 친구도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자식들도 타지에 나가 있고,
친정엄마도 분당으로 이사를 갔고,
친구처럼 지냈던 막내이모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도서관에 나가지 않으면 본이 아니게
내 성격 탓도 있어 집에만 있는 은둔생활을 하지만 불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겐 하나님이 골고루 준 자연이 있고 그걸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에
조금 외롭다고 느낄 땐 가을 물이 들고 있는 느티나무 길을 바라보면 된다.
자연은 내 맥박과 함께 어울려 온 몸 구석구석 온기를 전해
장작난로를 땐 거실처럼 마음이 따듯하고 포근해 진다.
느티나무하면 고향생각이 먼저난다.
느티나무는 마을사람들이 만나는 만남의 정류장이었다.
난 그 나무 밑에서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하고
저녁 무렵 엄마들이 불러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때
나만 남아 돈 벌려고 서울로 떠난 엄마 생각에
고갯마루를 멍하니 쳐다봤던 기억이 몇 백 년 된 느티나무처럼 커다랗다.
그래도 내게 있어 느티나무는 쓸쓸함만 있는 게 아니고
추억하는 나무로 남아있다는 것이 의아하지만 나무들 중에 느티나무를 제일 좋아한다.
느티나무 그늘에 서면 어떤 그리움이 채워지고
막연하게나마 무언가 이루어질 것 같은 희망으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느티나무 잎은 하루가 다르게 단풍이 들어간다.
짧은 가을이 아쉽듯 가는 세월이 덧없지만 정해진 절차대로
머물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면서 바쁘게 살아간다.
느티나무 정류장에 서면 뭔지 모를 아득함에 빠져든다.
저물어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던 고향과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나의 생활을 쓰던 장문의 편지와
세수수건만한 부엌 창에서 내려다보던 아파트 뜰과
호숫가에 앉아 우리의 꿈을 점쳐보던 그 어떤 날들과
지금쯤 내 곁으로 오고 있을 아직은 도착하지 않는 마지막 내 사랑과........
(말줄임표가 긴 이유는? 기대감이 크지 않으니까)
그 설렘과 가슴 저림이 느티나무 잎과 혼합이 된다.
설령 오지 않는다 해도 난 지금의 가을빛이 안개에 싸인 듯 신비롭게 아름답다.
노래 가사처럼 인생은 미완성이라 했던가?
난 오늘도 미완의 오색찬란한 길을 바라본다.
코앞의 시간을 알 수 없지만 지금은 행복했으니 됐지 아니한가.
우리가 걷는 인생길에서 착오 없는 길이 없었고, 내 맘대로 길을 만들 수 없었지만
올 가을은 느티나무 잎이 바람에 가볍게 날리는 정류장에 서서
버스대신 그리움을 기다릴 일이다.
내 나이만큼 상처와 쓸쓸함이 묻어있는 가을이지만
살짝 벤 상처에서 피 몇 방울을 보았다고 미련과 집착 때문에 호들갑떨지 말자.
돌아보면 억울하지만 이미 사소한 사건이었을 뿐 기절할 만큼 큰일은 아니다.
지금은 행복했으니 됐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