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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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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BY 새봄 2012-10-15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보아도 국 데운다고 가스 불을 켠 기억은 나는데, 이거 원, 끈 기억이 없다.

불안해서 도저히 책 정리를 할 수가 없다. 나 원 참.

안되겠다 싶어 사실대로 얘기를 하고 도서관을 공튀듯이 튕겨져 나왔다.

텃밭도서관은 외진 곳이라 사거리까지 가야만 택시를 잡을 수 있다고 해서

고등학교 때 달리기 실력을 발휘해서 땀나게 뛰고 있는데

빈 택시가 지나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뒷자리에 앉아 가슴을 진정 시켜본다.

분명 잘 껐는데 생각이 안날뿐이라고.

날씨가 덥죠?”

아저씨가 가을 날씨를 묻는다.

, 좀 덥네요.

당연하지 더운 정도가 아니고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다고요, 아저씨.

빨리 달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몇 분 더 빨리 간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창피해서 이 상황을 표시내고 싶지 않았다.

집 입구 도로로 들어가는데 또 얘기를 건넨다.

짓고 있는 저 건물이 상간가요? 모델 하우슨가요?”

철골조만 올라간 건물이 우측으로 보인다.

그걸 내가 알겠는가 말이다, 건물 주인이나 알겠지.

모델 하우스 같죠?”

....가스 불을 안 끈 것 같아서 일하다가 가는 거예요...”

아저씨가 마구 웃어주신다.

내 얘기가 재미있었나?

울 마누라도 툭하면 가스 불 안 끈 것 같다 전기장판 코드 안 뺀 것 같다며

나보고 갔다 오라고 하죠. 가보면 잘 꺼 놓고. 하하하

글쵸? 내 나이 땐 다 그렇죠?”

이제 안심이 된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분명 잘 껐으면서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니까.

얼마 전 이런 일도 있었어요. 그 아줌마는 친구들과 관광버스를 타고 들뜬 마음으로 일산을 벗어나 서울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스 불을 켜 놓고 온 것 같다며 택시를 타고 일산으로 들어왔는데 집에 가보니 가스불도 끄고 잘 잠그기 까지 했답니다. 그래서 다시 내 택시로 관광버스를 쫒아가 잘 모셔다 드렸죠. 크하하하

“푸하하하나도 따라 딥다 크게 웃었다.

 

집에 도착하니 과연 가스도 잘 끄고 중간벨브까지 잠겨 있었다.

작년에도 호수공원에서 얘들이랑 자전거를 신나게 타다가

불현듯 가스 불을 안 끈 것 같아서 집으로 내달려 온 적이 있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밸브까지 잘 잠가 놓고서 분위기를 확 깨놨으니...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마늘을 가지러 베란다로 나오면 왜 내가 여기 서 있는지

모르는 건 수시로 일어나는 건망증이고

난 요즘 그 남자 괜찮더라 순수해 보이고 개 좋아하는 연예인. 거 있잖아?”

개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도 많은데...엄태웅?”

맞아 맞아

엄만 참, 거 있잖아 하면 다 알아 듣는 줄 알아? 나니까 알아듣는 거라고~~”

난 텔레비전 보면서 거 있잖아? 연발을 하면 딸아인 어이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면서 대답을 해주었었다. 지금은 딸아이가 없으니......있잖아? 혼자 답답하다.

 

처음 도서관 일을 배울 땐 말로 들어선 기억을 못해서

일일이 수첩에 적어 놓고 일을 익혔다.

그래서 직장을 구할 때 나이 먹은 아줌마들을 안 쓰는 이유를

나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들이 기억력도 좋고 이해력도 훨씬 낫고

눈으로 보기에도 사십은 사십의 얼굴이 있고, 오십은 오십의 얼굴이 있다.

세월이 흐른 만큼 팽팽한 젊음은 따라 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말이다.

도서관에서 일해 보면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우리보다 몇 배 빨리 일을 배우긴 하지만 열심히 하지 않는다.

책은 대충 꽂아 놓고 데스크에 앉아서 컴퓨터랑 신나게 놀고 눈치도 보지 않고 채팅을 한다.

나이가 많을수록 꼼꼼하게 책을 정리하고 부지런하게 일을 찾아서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은?

일단 출근할 땐 밑반찬으로만 밥을 먹겠다.(가스 불 켤 음식은 먹고 싶어도 참기로 함)

신발을 신기전에 꺼진 가스불도 다시보자.

(집에 있을 때도 가스를 쓰면 중간벨브까지 잠그는 버릇을 꼭 들이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가스 불을 썼으면 출근할 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야겠다.

(잠근 걸 잊어버리니까 사진을 보면 일하다가 튀어 나올 일은 없을게 아닌가)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택시기사님 말따나 날씨가 조금 덥지만 끝내주게 좋다.

가을 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10월이잖은가.

겉옷을 벗어 한 손에 쥐고 발걸음도 가볍게 텃밭 도서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