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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 같은...


BY 새봄 2012-09-20

텃밭 도서관은 겉도 안도 회색이라  주변 초록색이랑 잘 어울리는 조용하고 얌전한 건물이다.

이 도서관은 다른 도서관에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벽걸이 선풍기가 그것이고 또 하나는 왼쪽 창가에 텃밭이 넓게 보이는 것.

텃밭은 네모난 초록계통 천을 손으로 꿰맨 푹신한 조각 이불 같다.

그리하여 내 맘대로 멋대로 텃밭 도서관이라고 간판을 달게 되었다.

 

텃밭도서관은 이리보고 저리 둘러봐도 어릴 적 왕십리 만화방 같은 느낌이 든다.

벽걸이 선풍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장식 없는 밤색 탁자에 오래 묵은 책들하며

창가에 등을 댄 단순한 감색 소파까지.

그리고 종일 도서관에서 살고 있는 백수 젊은이가 있는데,

어릴 적 만화방에도 그런 남자가 몇 명쯤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더 만화방 같다.

책과 눈 맞는 시간보다는 탁자와 볼 맞대고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제멋에 겨운 긴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그 젊은이 곁을 지나만 가도

저요... 머리 감은지 오래됐어요.’ 하고 나한테 말을 걸어서

나도 모르게 거~ 쫌 감고 다니셔.’ 할 뻔했다.

식객 만화책을 쌓아 놓고 보는 학생도, 나도 이 책을 쌓아 놓고 봤었다.

억대 부자 되기 책을 보는 중년의  남자분도

나는 이런 책을 안 봐서 그런지 부자가 안돼서 유감이지만 말이다.

컴퓨터 책을 보시는 하얀 머리 할아버지도 단골손님이다.

난 만화방 주인이 되어 그 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한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네 바퀴 달린 의자는 방정맞게 삐걱삐걱 같이 인사를 한다.

 

왕십리에서 십대를 보내고 처녀시절을 보냈었다.

그 때 만화방을 들락거렸고. 만화 볼 돈이 항상 부족했다.

그래서 엄마가 십일조 모아놓는 주머니에서 일이백 원을 훔쳐 만화를 보러 다녔다.

구슬이 많이 달린 주머니였다. 엄마는 왜 그렇게 예쁜 곳에 십일조를 모으셨는지 모르지만

청상과부였던 엄마는 유일하게 기댈 곳이 하나님이었고, 하소연할 곳이었고,

울며 자식들을 위해 기도할 신이였기에

십일조도 예쁜 구슬가방에 넣으시며 축복해 주시옵소서, 축복해 주시옵소서. 했을 것이다.

여자아이들은 순정만화만 봤다. 그 중에 나는 엄희자님의 팬이었다.

그땐 만화가 완결편 없이 한참 만에 한권씩 나왔다.

연속극 다음회가 감질나고 눈 튀어나오게 기다려지듯이

다음편이 언제 나올지 궁금해서 만화방을 발탄 강아지 처럼 들락거렸고

나왔다하면 촘촘히 박힌 구슬 주머니를 찰랑찰랑 열었다.

그러다가 큰 동생이 나처럼 만화를 보기위해 십일조 주머니를 만지는 걸 보고선

그 다음부턴 훔치는 걸 그만두었다.

그동안은 그 짓이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동생과 같이 그 돈을 훔치면 엄마가 곧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이 싸가지 없는 것들 내 돈을 훔쳐가!” 노여워서 벌주실 것 같았다.

어쩐지 큰 동생과 만화방에서 가끔 마주쳤고 서로 눈치 보며 못 본척했던 기억도 난다.

 

 

텃밭 도서관에 출근한지 이틀째 되던 날

푹신한 소파가 놓인 왼쪽 창가에서 뭐 뀐 냄새가 자꾸나서 눈길이 그쪽으로만 갔다.

분명 어떤 분이 진하고 끈적끈적한 방구를 꼈다며 속으로 흉을 봤는데

그 여운이 가시질 않는 게 이상해 고개를 길게 빼고 소파 쪽을 쳐다보니

창 가득 텃밭이 보였다.

창문 가까이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법 넓은 밭은 풍년이었다.

호박잎도 깻잎도 가을 체크남방으로 갈아입는 중이고

근시가 있는 눈으로 보니 익은 고추가 꽃잎 같았다.

오른쪽 창밖엔 공원이 있어 대화하는 소리가 울려 3층 도서관 안까지 새처럼 날아왔다.

그랬다니까 그래. 깔깔깔깔.”

야 인마, 짜샤!”

하도 다양한 소리가 나서 내려다보니 정자아래 할머니들이 둥글게 앉아 있고

학생아이들이 서로 만나고 뛰어가고 그 나름대로 바쁜 인생이었다.

 

왕십리 만화방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만화방도 같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창밖엔 진짜 화장실 냄새가 솔솔 들어왔고, 찐빵냄새면 얼마나 구수할까 했었다.

그 시절엔 대문과 붙은 재래식 화장실이 집집마다 하나씩 있었다.

여러 가구가 사는 집에 주인집이고 뭐고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고 나발이고 공동화장실 하나로 해결했던 시절이었다.

지붕이 낮고 굴속 같은 집들이 따개비처럼 모여 살던 왕십리엔

식구도 많아서 사람들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땐 화장실 냄새가 나든지 말든지 침 묻혀 만화책을 뒤적이고,

시장 통 사람들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여기 도서관에서도 거름냄새가 나도 책을 뒤적이고,

공원에서 남녀노소가 떠드는 소리에도 졸기도 잘도 존다.

오늘도 젊은이는 한낮 오수를  즐기다가 한쪽 볼때기가 벌게 가지고 만화방같은 도서관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