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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뜰 즈음에


BY 金木犀 2012-06-11

경상도 남잔 집에 들어오면 아는? 하고 충청도 사람은 뭘 먹을 줄 아나 물을 때 혀? 안혀? 하며 전라도는 적당한 말이 안 떠오를 때 거시기로 말을 축약 내지 함축한단 야그가 난 참 좋다. 우리 강원도도 드러눕다를 둔넛다로 보고 싶다를 보고수와로 표현하는데 정겹고 아름답다.

 

해서 난 말을 길게 늘여쓰거나 하는 글을 보면 원고질 채울 요량이 아니라면 지루하게시리 왜 저럴까? 생각하곤 한다.빅톨 위고가 출판사에 책 팔리냐를 ? 로 써 보내자 출판사가 잘 팔린다를 !라고 답했단 일화가 있듯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글도 말도 간단해야 좋은 게 아니던가?. 주례사나 축사가 빨리 끝내야 박수받는 이유도 그러리라 그 속에 촌철살인의 비수가 날아간다면 그런 팁이 어디 있으랴 .

 

한자를 가만 들여다 보자면 어쩜 저렇게 형상을 추리고 추려 핵심을 그려내고 저토록 이쁜 글자를 만들어 냈을까 감탄하곤 한다. 중국어를 몰라도 한자만으로도 금방 그 뜻이 와닿게 하는 편리함은 또 어떤가? 동아시아가 오랜 세월을 두고 중국문화권을 떠날 수 없는 큰 이유의 하나도 글자의 함축성과  이심전심으로 전해오는 뜻글의 힘 때문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우리 속담에도 작은 고추가 맵다더라. 가까운 예로 기계류의 경우 용도는 많되 점점 작고  갖고 다니기 편한 것이 인기다. 의상도 마찬가지다. 필요없는 장식이 사라지고 통풍과 편함 그 위에 아름다움이 비로소 덧붙여져야 대박임에랴?

 

최근 갈라선 남녀 사이에 출생한 자녀의 경우 그 어머니의 성을 붙이거나 새 아버지의 성을 붙이는 경우가 있더라. 더욱이 아이들이 여럿인 경우 아버지의 성을 각각 붙이느니 어느 한쪽으로 몰아 아이들끼리 일체감을 주기 위한 요량같다. 그만큼 생물학적 아버지나 어머니에 비중을 두지 않으려는 궁리 끝에 나온 그 나름의 박애적 시도라 할까?

 

그렇다면 아버지의 성에 외할머닌지? 어머닌지? 성을 더해  김이아무개 박육아무개式 으로 표현하는 경우엔 어떠할까? 쉽게 말해 씨와 밭이 이러하다고 드러내는 그 시도가  핏줄간에도 모계 부계가 서로 다른 경우 더 얽히고 설켜 부르고 익히기에 더 복잡해지진 않을까?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어머니 아버질 더 강하게 부각시켜 위화감을 은근히 조성하고 물 보다 진한 피의 이미질 활짝 드러내는 결과로 돌아오진 않을런지?

 

아 아!! 그러고 보면 난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옛 방식이 좋다. 자식 오래 살라고 이름 길게 지었다가 그 이름 부르고 부르며 물에 빠진 앨 구하러 갔더니 그 사이에 벌써 북망산행이더란 코메디도 있지만 러시아인가 어딘가식으로 이름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에 어머니 죄다 올려 긴 걸 보면 당췌 외울 수가 없고 부르기도 어려운데 우린 참 현명하네 최가든 곽가든 아버지 하나만 따르는게 간단하고도 더 실리적이네 싶어서다.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네가 족보와 성을 무시하지 않고 살아왔음은 경험상 과학적이고도 끈끈한 뭔가를 내팽개칠 수 없는 타당하고도 인간적인 조건이 엄청 내재한 지혜의 발로라 보면 무리일까?

 

마지막으로 조심스레 덧붙이자면 그렇게 애들 성을 바꾸는 수고스러움에 앞서  내가 왜 니들 성을 여럿이 되게 생산하였는가를 합리적이고 당당하게 얘기하고 판단은 성인이 된 후의  자식에게 맡기는 씩씩하고도 진득한 어머니를 기대해 봄은 난망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