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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아버지...1


BY 푸르메 2011-12-26


돌아오는 28일은 아버지의 기일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일은 기억하는 몇 자식에게만 잠시

기억되어지는 날이다.

슬하에 자식 여덟이나 두셨건만 스무 해가 다  되어가는 동안

아버지를 기억하며 온 가족들이 모인 날은 몇 번이나 될까.

 

장남의 묵직한 책임을 지닌 남동생은

오토바이를 타고 낚시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났는데

수술한 의사는 오토바이 손잡이에 부딪힌 장출혈이라며

그다지 큰 사고는 아니라고 했었다.

하지만 다음날 병원을 지키고 계시던 엄마한테 급하게 전화가 왔었고

가장 가까운 곳에 살던 우리 부부가 달려갔을 때

동생은 응급실로 옮겨져 심폐소생을 하고 있었고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동생은 갔다.

처녀적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던 엄마는

병원 실수라며 통곡하셨다.

수술 후 방귀가 나오지 않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다가

목이 마르다며 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동생이 안타까워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물은 마셔도 된다는 답이었다나.

물을 마시고 난 얼마후 호흡 곤란이 왔는데

주말이라 담당의사가 자리에 없어서 시간이 지체된 후

처리가 시작되었다는 말씀이셨었다.

의료업에 종사하는 언니의 조언으로 장례비만 부담하는 조건으로

병원측과 마무리를 하고 화장을 한 동생의 몸은 그애가 잘 다니던

낚시터 근교의 산허리에 가루로 흩날렸었다.

 

그렇게 큰동생이 가고

자연스레 장남의 책임이 맡겨진 두 째 동생에게

아들 노릇은 버거운 책임이다.

 

중학교만 졸업한 동생은 내가 가리봉동의 전자회사를 다닐 때

다른 회사를 다니며 함께 자취한 적이 있었는데

나랑 사뭇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야단을 치곤 했었었다.

남편을 사우디 건설현장에 보내고

국민학교에 다니는 딸 둘과 살던 아주머니의 안방과

베니어판을 잇대어 붙인 쪽방 한 칸을 세얻어 살았는데

화장실도 동네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공장에서 받는 월급의 일부는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내져

부족한 생활비의 일부가 되었지만 스무살 무렵의 내가 짐작키는

여전히 가족들은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으리라 여겼다.

그런 가족들과 어린 동생들 생각이 나서 빵 한조각도 허투루 사먹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날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하여 돌아오니

동생이 주인 아이들과 함께 과자를 먹으며 놀고있는게 아닌가.

물었더니 동생이 사가지고 온 들어왔다는 대답.

너무 화가 나서 쥔집 아이들은 우리 동생들보다

더 잘먹고  사는데 왜 넌 그애들에게 과자를 사주느냐

한푼이라도 아껴 차라리 동생들 과자값이라도 보내주지 야단을 했지만

그 후에도 동생은 여전히 주인아이들에게 과자를 사주곤 했었다.

음...저녀석은 가족에 대한 마음이 나랑 다르구나...

결혼을 하고 한 가장이 되어서 가장의 책임은 철저한데

아들, 특히 책임을 떠맡은 큰아들의 노릇은 하지 않는다.

 

내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술에 취해 비틀대던 아버지께서

사고를 당하셨었다.

뇌수술을 받고 깨어나지 못한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던 버스운전사에게

엄마는 그러셨단다.

당신이 옆에 있다고 저 사람 깨어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

가서 일하라고...나중에 보니 길에 쓰러져계신 아버지를

버스 운전기사가 차에 탄 손님들을 모두 내리게 하고

버스회사 지정병원으로 이송해서 수술을 시켰다는

본인과는 무관한 사고라고 사건이 조작되어 있더라나.

자취하고 있던 남편의 자취방에서 가족들의 동의하에 동거하고 있던

우리가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땐 사고는 그리 처리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혼수상태셨었다.

그때 처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경험을 하고 충격을 먹었었다.

힘있는 자의 횡포.

버스회사와 운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사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을 찾아내 증인을 서달라 부탁을 했는데

증언하겠노라 장담하던 사람은 재판일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