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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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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BY 매실 2010-12-29

나도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경험치를 기준으로 남을 이해하고

그 이상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시부모를 이야기할 때 특히 그걸 느낀다.

나는 가끔 여기에 털어놓으며 나의 아직 치유되지 않고 남아있는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려 한다.

세월이 흘러 다 잊은 것같아도 문득 문득 되살아나는 기억은 무섭다.

잠을 앗아 가고 가슴속에서 뜨거운 분노를 일으킨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이 잘 되길 학수고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게 생각하지만 안 그런 부모도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긴 누구나 부모 공부를 해서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따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 차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살아가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

 

이 집안에서 \'맏아들\'이라는 꼬리표는 마치 천형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권리는 없고 부모와 형제를 위한 의무만 있고, 위계질서도 없어서

동생들이 치받아도 무시받아 마땅한 존재였고 아무리 잘 해도 잘 했단 칭찬도

받지 못 했다.

 

끝없는 요구를 다 받아들여야 했고 그래서 내자식들이 헐벗고 굶주려도 상관없었다.

너희는 너희 자식들에게서 받으라고 했다.

많이 받고 싶을수록 자식을 더 많이 낳으라고도 했다.

아이를 누일 자리도 없는 살림살이인데도...

 

어려서 달랑 한 둘 다니던 미술학원 태권도장도 그만 끊으라고 종용했다.

당신들에게 돌아갈 몫이 적어질까봐.

 

처음 열 다섯 평짜리 아파트를 대출을 반이나 끼고 장만했을 때

시부모는 노발대발 했다

남들은 월세를 살면서도 부모에게 따박따박 돈 보내는데 너희는 뭐가 급해서

벌써 집을 사고 난리냐고.

대출금 갚으려면 생활이 더 어려워질거 아니냐고.(그러면 당신들이 받을 돈이 적어지니까)

맨손으로 시작해서 집장만 하느라 수고했다 칭찬받을 줄 기대한 우리가 바보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지만 시부모는 조부모에게서 받은 재산이

많았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평생 일을 안 해서 가세가 기울었을 뿐.

시어머니는 우리에게서 그 한을 풀고자 했던 것같다.

 

내남편은 삼 십 평생을 그 손에 길러져서 시키는대로 말 잘 듣고

동생들과는 달리 맘이 약해서 싫어도 자식노릇은 해야하는 줄 아는 사람이어서

만만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남편이 혹시 시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아들은 아닐까 의심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외모도 시어머니와 많이 닮았고 친척들이 그러는데

친어머니와 친아들 맞단다.

 

나는 그런 사람과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연거퍼 둘이나 낳았기 때문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집안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내자리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 애들을 두고 이 곳에서 탈출을 해야하나?

심각히 고민하며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내가 이혼하겠다고 나서면 첫손주들이라 내주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 때만 해도 양육권이 여자쪽으로 오기가 쉽지 않던 때다.

 

그래도 우리가 맨손으로 사업이란걸 시작해서 제법 잘 풀릴 땐

모든 게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듯했다.

그 시기엔 시어머니도 더할 수 없이 우리에게 잘 해줬다.

역시 큰자식 밖에 없다고,큰 며느리 너 밖에 없다고, 다른 자식들은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

 

하지만 서서히 사업이 쇠퇴하기 시작했을 땐 완전 딴 사람이 되어

냉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져서 였을까?

혹시라도 손 벌릴까봐 그랬을까?

 

하긴 그 이전에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서 실직을 해서 반 년을 백수로 지낸 적이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이전에 사흘이 멀다 하고 하던 전화를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안부전화를 해도 \"취직은 했냐?여태 못 했냐?별 용건 없으면 끊자? \" 뚜뚜뚜----

 

나같으면 아들가족이 굶어죽지는 않았는지 궁금하기라도 했을 것이고

맘고생할 게 가슴아팠을텐데...그래서 말로라도 위로를 했을텐데...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이런 이상한 모자관계는 시어머니의 배신으로 마침내 끝이 났다.

큰아들 며느리에게 온갖 누명을 씌우고 수족 못 쓰는 시아버지를 남겨두고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느라 글씨를 알아보지도 못하게 휘갈겨 쓴 유서는

지금 떠올려도 섬뜩하다.

누구나 아무리 잘못 살았더라도 마지막에는 사과하고 서로 용서하고

마무리를 잘 하고 떠나야 하는거 아니었던가?

그건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일까?

 

그간의 우리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고 우리는 졸지에 어머니 잡은

패륜아가 되어 가슴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가 새겨진 것같았다.

 

그 이전에도 모든 병원비며 생활비를 우리가 다 감당했지만 시아버지의 병수발이

오롯이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 어이없고 분하고 억울했다.

 

그 누명을 벗기까지 무척 오랜 세월이 걸릴 줄 알았는데

천만다행으로 오랜 세월 우리를 겪어본 주변인들과 친지분들이 이해를 해줘서

생각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제 우리는 홀가분하게 살 수 있겠구나 했는데

사업은 더욱 더 어려워져서 우리집에는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차라리 폭풍우가 치는 것보다 더한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시아버지는 몇 년 더 사시다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떴다.

장례식장에서 시동생이 전에 엄마가 유언한대로 부모의 남은 재산은 자기들끼리

1/N로 나누겠으니 형은 포기하고 빠지라고 했다.ㅎ

 

그래서 그렇게 했다.

 

우리는 대인기피증환자처럼 사람들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

전화조차 두려워서 받아도 좋을 번호인지 늘 확인해야만 했다.

 

조금 있으면 TV에서만 보던 빨간딱지를 붙이러 사람들이 들이닥치겠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그래도 우리는 견딜 수 있지만 한창 예민한 시기의 우리 애들이 받을 상처가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동안 내가 모든 정열을 쏟아부어 키우고 가르친 것들이 다 물거품이 될 것같은

순간이었다.

 

생각다 못해 결단을 내렸다.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로..

그래서 아들은 진작부터 보내려고 했던 곳, 지인이 있는 해외로 보냈고

딸은 더 좋은 학교를 마다하고 학비와 기숙사비를 제공해주는 학교로 보냈다.

그게 우리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둘만 남아서 견디는 날들도 정말 지옥같았다.

남편은 원래부터 애주가여서 술마시는 정도가 더욱 심해져갔고

두려워 떠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자칫 폐인이 될 것같았다.

 

나는 믿고 의지할 데가 아무데도 없었다.

저녁에도 불을 켜지 않고 멍하니 TV 화면만 바라보며 견딘 적도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내가 어디가서 막일을 해서라도 아들의 생활비는 감당할 수 있을까?

너무나 궁리가 많았다.

내가 모든 걸 포기하면 우리애들은 어떻게 되나?

 

그 때는 아이들이 나의 힘의 원천이었고 삶의 목표였다.

그들을 위해서 나는 어떡하든지 살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금융권에 남편의 연대보증인으로 되어있는 나는 어디에 취업하더라도

월급을 내손에 쥘 수가 없었다.

정식 일자리가 아니라면 몰라도.

 

그래도 웬일인지 상상했던 험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빨간딱지를 붙이러 사람들이 들이닥치지도 않았고-우리가 빼돌릴 만한 재산이

전혀 없기 때문이란다-

경제가 다같이 어려운 때라 그들도 우리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는 분위기였다.

다같이 어려운게 고맙기까지 했다.

 

약간의 땅과 공장과 집은 모두 경매로 넘어갔지만 자연스럽게 세를 얻어서

나올 수 있었고 그간 쌓아온 기술력을 바탕으로 재기를 꿈꾸게 되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내자식들을 살릴 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남편도 술을 끊고 희망을 가지고 다시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나도 그간 배워둔 알량한 실력으로 여직원이 감당해야할 모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진작에 어깨너머로 이 것 저 것 배워두길 잘 했다 생각하며

머리를 써야하는 일부터 때로는 허드렛일까지 앞장서서 했다.

우리같은 어려운 회사에 남아서 우리만 바라보며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그 게 불과 5년전쯤 일이다.

아직은 다 해결되지도 않았고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아이들은 한 차례의 고비를 넘기면서 무사히 대학생의 반열에 올라섰고

어렴풋이 집안 살림이 어려워진 줄은 짐작해도 구체적인 일들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재기하기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다시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간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둡던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우리 가족 어느 누구도 큰 병을 얻지 않았고

가정이 와해되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같아 보였지만 모든 어려운 일들은

시간이 흐르면 다 지나가게 마련이었다.

 

사업에 실패하면 죽음의 길을 선택하거나 심한 우울증에 걸리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큰 병을 얻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너무나 다행히도

그 모든 것에서 비껴갈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우리는 돈만 잃었을 뿐이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