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우리 집안의 가장과 같은 존재였다. 아들 다섯에 딸 둘, 그리고 지긋지긋한 가난만을 남겨두고 막내인 내 나이 다섯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요즈음의 다섯 살 아이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영특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 시기의 우리 가족에 찾아온 그 엄청난 사건마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다만 기억하는 것은 내 다섯 살의 겨울이 지금의 겨울보다 훨씬 매섭게 추웠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 매섭게 춥던 내 다섯 살 겨울의 어느날, 동네 한 귀퉁이에서 아버지의 옷가지라고 나중에 알게 되었던 것을 태우면서 서럽게 울던 어머니의 모습 정도이다. 내가 어머니의 울음에 따라 울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형이나 누나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던 그 시간에 나는 누군가가 집어 준 ‘누가사탕’의 달콤함에 빠져 거의 울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누가사탕’의 달콤함에 탐닉되어 있는 동안 나와의 많은 시간을 가지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렇게 더 이상 나와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본디 평양북도 영변 사람이다. 아버지는 영변에서 꽤나 잘 사는 아들만 넷을 둔 집안의 막내 아들이었단다. 첫째와 셋째 형은 약사, 둘째 형은 의사로 모두 공부도 잘했지만 그 뒷바라지를 할 정도의 부를 보유하였단다. 하지만 아버지는 젊은 날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한량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생활로 무던히 아버지의 아버지의 속을 썩여왔던 아버지는 31살이 되어 12살이나 차이가 나는 어머니를 만나 비로서 정착을 하게 되었단다. 함경남도 청진에서 과수원을 하는 집안의 첫째 딸이었던 어머니는 12살이 얼마나 커다란 나이 차이인지도 알지 못한 19살에 결혼을 하셨다 한다. 어린 신부를 만난 아버지는 모처럼 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아버지의 아버지는 며느리가 마냥 고맙기만 했단다. 그래서 어린 며느리지만 며느리의 의견을 되도록 받아들였고 그런 어머니를 앞세워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가게를 차릴 충분한 돈을 얻어왔다 한다.
의류를 중심으로 여러가지 품목을 다루었던 가게는 함경남도 신창읍에 열었다 한다. 젊은 날 이곳 저곳을 방랑했던 아버지의 한량 같았던 경험은 장사에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다. 사람들과의 어울려 사는 방법과 세상의 이치를 빨리 깨달은 덕분이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게의 규모를 상당한 크기로 키워 내셨다 한다. 제법 넉넉한 집도 장만하고, 귀하디 귀한 소련제 하얀색 자전거도 사고, 고기를 좋아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집안에 고기가 떨어질 날도 없었다 한다. 하얀색 자전거와 고기는 어머니의 피난 얘기때마다 등장하는 당시의 부유함을 상징하는 의미있는 품목이다. 머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말 그대로 잠시 난(亂)을 피하는 피난으로 생각했던 아버지는 집안에 있던 고기도, 쌀도, 그리고 동네사람 모두가 경외스럽게 쳐다보던 소련제 자전거도 곳간 옆에 기대어 세워놓고 그대로 나왔다는 것이 어머니가 피난 초기를 얘기할 때마다 아까워하면서 말하는 품목인 것이다. 이러한 품목들은 그대로 두고 나온 반면 어디를 가도 돈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 아버지는 가질 수 있는 돈은 가능한 챙기셨단다. 그래서 누나와 큰형은 걸음을 걸리고, 지금 암에 걸린 둘째 형을 업고 나오는 것이 피난 시 가진 거의 전부였다 한다. 다른 피난민들처럼 솥도, 그릇도, 이부자리도 없이 그렇게 피난 길을 떠난 것이었다. 보유한 물품에 따라 피난 생활의 수준이 달라지던 때였지만 수중의 돈으로 아버지, 어머니, 큰 누나 그리고 두 형의 피난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어렵지 않았다 한다.
잠시 동안이겠지만 난(亂)은 되도록 멀리 피해야한다는 아버지는 특유의 ‘빠릿빠릿함’(어머니의 표현)으로 그 어렵다는 교통편을 잘도 마련하며 함경남도 신창을 떠난 지 아흐레 만에 한반도의 최남단에 다다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바다가 가로 막혀 더 이상 피난을 갈 수 없게 되자 그곳에 임시 정착을 결심하였다 한다. 피난 동안 사용하신 비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중에 적지 않은 돈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는 무엇인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피난 온 객지에서 또다시 가게를 열었다 한다. 이북에서의 경험, 상대적으로 넉넉한 자본으로 적지 않은 규모의 가게를 빌어 피난 온 사람들과 현지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지만 이북에서만큼 잘되지는 않았다 한다. 그 와중에 막내인 나를 포함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더 얻게 되자 아버지의 조급함은 커져갔다 한다. 이북에서만큼 장사는 잘 되지 않고, 잠시의 피난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고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지게 되고, 일곱 자식들은 커가게 되자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조급함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또 다른 사업 기회를 모색하던 아버지는 당시 높은 수익을 주던 미군 물품을 싸게 들여올 수 있다고 접근한 사기꾼에게 속아 가진 모든 재산을 날려 버리게 되셨다 한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풍을 맞아 자리를 보전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내 나이 세살때였다.
자리를 보전한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다 한다. 그 누구보다 강했던 자신, 아직 어린 일곱자녀, 그리고 아버지 가게에서 가끔 일을 도왔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 등으로 아버지는 그렇게 자리에 누운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어떻게든 일어나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한다. 그러자 점차 가족에 대한 미안함, 특히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을 자주 토로했다 한다. 하지만 그런 시기가 지나고 돌아가시기 육개월 전부터는 평소 아버지의 성격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짜증과 노여움을 표출하셨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짜증과 노여움이 극에 달하던 설날 이틀 전 아버지는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이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때가 지금 암에 걸린 형이 겨우 열 여덟살이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