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커피 1잔을 마시고 또 한잔 더 붓는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
수족구병으로 1주일 넘도록 고생한 시간도 지났고 화실친구들의 전시회도 몇군데 다녀왔다.
주부로서는 가장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
이 시간만큼은 집안일도 미루고 온 몸에 힘을 빼놓는다.
남편의 전화 “오늘 KT에서 셉톳박스 가지러 올거고 12시엔 케이블에서 나올거구...”
마지막에 하는 말 “지금 모해?”
“으응..그냥 쉬고 있어. 며칠 너무 돌아다녔더니 허리도 아프고 죽겠네.”
“어제 일찍 자더만..요즘 많이 약해졌어”
사실은 인터넷으로 반찬 장보기 하고 있었는데...그것도 일이었건만 왜 쉰다고 했는지...
남편은 정말 집에서 내가 쉬고 있을거라 생각하겠지.
왜 돈버는 일이나 돌아다니는 일외에 집안에만 있으면 쉰다거나 논다고 표현을 하는지,
나도 참 입버릇이 참 고쳐지지 않는다.
남편이 걱정하는 것은 내 몸일 터인데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의 상태를 말하게 된다.
사실은 집안일도 만만치 않은데 말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실은 월드컵중계보다도 더 박진감 넘치는 선거개표결과도 밤늦도록 지켜보았고
주말농장에서도 속아내기가 무섭게 겁나게 올라오는 쑥갓과 열무,얼갈이,상추들을 뜯어내고
잡초뽑느라고 바빴다. 얼갈이와 열무는 벌레들이 다 뜯어먹어 농사를 망쳤다.
그래도 뽑아내는동안 여기저기서 꼼지락거리며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지렁이들과 달팽이들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와는 반대로 서로 보겠다고 달려드는 아이들한테는 자연공부를 시킬수 있으니 보람찬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실은 예전에 내가 가장 소망하던 시간이다.
남편은 직장에 나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갈 시간이며 집안일을 잠시 미루어두고 쉴수 있는 나만의 시간과 혼자만의 공간...
예전 처음 직장생활 할 때 이모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들었다.
어쩌다 쉬는 날 아침 설겆이를 끝내고 차 한잔 할 때 정신없는 아침을 정리하고 한결 여유로와진 이모의 모습에서 그 시간대가 주는 행복감을 느낄수 있었다.
당시 출판사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책을 직원가로 할인해서 살 수 있었다.
박상우의 신작 3편을 막 읽으려는데 이모가 그 책을 보고 싶어하셨다.
평소 독서를 취미로 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의외다 싶었지만 선뜻 3권을 모두 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다 읽고나 드릴껄 하는 후회가 들긴 하지만,
한번도 읽지 않은 새 책을 선물도 드렸다 생각하면 잘한 일이다
아무튼 미래의 주부가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소설 30편 전집도 할인된 가격에 구매해놓고 책장속에 박아 두었는데 언제나 읽으려는지...
한자까지 섞여 있어 솔직히 제목도 모르겠다.
딸아이가 자라서 문학소녀가 되면 좀먹고 바랜 이 책들을 좀 읽으려나...
책 한권을 읽고나면 쓰고 싶어지는 무한 욕구...
책 한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샘을 퍼올리게 하는 물 한바가지와 같다.
하지만 평소 생각을 많이 하는 버릇은 타인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감상에 쉽게 젖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연애를 변변히 오래해보진 않았지만 사람과의 만남에서 나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들어주고 깊이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 역시도 웬만큼 친해지지 않으면 마음을 잘 열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한 사람들을 좋아했었다.
그들의 식견에 방대한 문학적 지식에 사고의 깊이에...
왠지 대화를 나누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대화의 맥이 끊기지 않을 것 같아서..
더러 그러한 지식의 소유자가 활달한 성격에 외향적이며 사교적이기까지 하면 껌벅 넘어간다. 하지만 막상 친해져서 보면 소심한 성격에다 내성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기가 두렵다. 그게 더 친해지지 못한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풍부한 사고의 동력은 아마도 독서량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무한정 하게 될 때 마치 내가 무슨 특별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건 그냥 나의 몽상가적인 버릇이었고 그런 것을 좋아해준
사람이 있었기에 더 이상 올드미스가 되지 않고 11시를 사랑하는 주부가 된 것이다.
공대를 나왔지만 감성이 풍부한 울 남편마저도 결혼하고 보니 그냥 보통의 남편과 똑같다.
나 역시 연애시절의 그 많던 생각의 바구니들은 이미 부셔버리고 그냥 평범한 다른 아줌마와 똑같이 되어 버렸다. 멍석을 깔아놓고 나 자신이 가장 잘하는 몽상을 해보겠다며 커피도 두잔씩 벌컥벌컥 마시고도 정작 단 한줄의 생각도 끌어내지 못했다.
일상의 일기는 늘 쓸 수 있다.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그런데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에 대해서는 한줄도 쓸 수가 없었다.
오늘도 나는 며칠째 쉬고 있다.
좋은 책 몇 권을 읽으면 생각의 우물에서 그것들을 퍼올릴 수 있으려나...
그냥 아무 말없이 그림에만 몰두하는 친구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아...나 어떡해야 되나
행복한 11시는 이미 정오를 훌쩍 넘겨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