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도 지났고 말복까지 지낸 요즘 날씨는
유난히 길었던 장마 뒤의 햇살이라 그런지
누가 말갛게 닦아 놓은 유리알 같은 햇살이다.
매연까지 거의 없는 시골의 햇살은
하늘에서 거칠 것 없이 바로 내려 쏟아지는
무저항의 따갑고 톡~쏘는 듯한 강렬한 햇살이다.
벌써 고추밭의 붉은 고추가 시골집 마당 한켠에서
자랑스런 몸을 드러 눕히고 맑은 걸레질로 목욕까지 하고
순간순간 쪼그라들게 하는 강한 햇살아래에서
말라주는게 가장 최선의 보답인양 파스락 파스락
작지만 강한 몸부림의 소리를 내며 잘도 마른다.
허리가 잘록한 땅콩도 뜨겁게 달구어진 시멘트 바닥 위에서
이리 뒹굴~저리 뒹굴 썬텐 중이다.
한두개씩 섞여있는 쭉정이를 골라내는 촌 아낙의 얼굴은
햇살에 그을려져 있긴 하지만 행복한 주름이 피어난다.
객지로 떠난 자식들 앞으로 마른고추며 땅콩을
올망졸망 보따리를 지워 택배를 보낼 생각에
벌써 손주녀석이 삶은 땅콩을 까 먹는 고소한 입이 보이는 듯 행복하다.
습하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바람이 부는 요즘
곧 다가 올 추석이 떠 오르며 어린 날의 추억 한장.
어른이 된 후의 추석에 대한 추억은 온통 음식 장만과
오고가는 장거리 여행의 교통체증에
시댁이며 친정 나들이 때 들어 갈 돈 걱정에 힘들었지만
철부지 어린 날에는 그런 문제는 어른들의 문제였기에
추석에 큰엄마 댁에 가는 날 아버지랑 내가 들고 갈 추석장으로
장에 가서 쇠고기는 몇근이나... 닭은 또 얼마나 큰 걸 사 주실건지
아버지 새 와이셔츠는 몇호를 사 주실건지
그것보다는 내 새 옷을 어떤 모양의 어떤 색으로 사 주실건지
그것만 궁금했었다.ㅎㅎ
위로 오빠들만 넷이었기에 헌옷을 물려 입을 염려도 없었고
오로지 엄마가 새로 사 주시던 추석빔이 기다려졌었다.
엄마는 늘 내 몸보다 큰 칫수의 옷들만 사 주셨었다.
물려 입을 언니도 물려 줄 여동생도 없었기에....
난 새 옷이고 이쁠 때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싶었지만
엄마는 큰 옷을 사 주시며 두해나 입어야 한다셨다.
항상 팔소매는 손등을 덮었었고
바짓가랑이도 한두번 올려서 입어야했던게 불편했지만
그래도 늘 새 옷이어서 좋았다.
또래 친구들은 언니 옷을 물려 입는 애들도 많았었고
그 시절엔 요즘처럼 수시로 새 옷을 사 주시던 부모님들은
아주 형편이 좋은 집 몇몇을 빼고는 드물었기에
명절이나 되야 새 옷을 얻어 입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엄마는 딸 하나의 옷을 공주 옷 같은 봉긋한 치마라도 좀 사 주시지
언제라도 바지에 남방이나 티셔츠 같은 간편한 옷을 사 주시곤 하셨다.
사내아이들이 많은 집안에서 하나있던 딸 옷을 좀 이쁜 걸 사 주시지 말이야....
속옷도 그냥 무난한 흰팬티만 사 주셨고 양말도 질긴 양말로만 사 주셨었지.
그 땐 한창 어려웠던 우리집 형편이었으니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고 엄마식의 호강은 시켜주신 셈이다.
가끔 유행하던 나팔바지..판타롱도 사 주셨지.ㅎㅎㅎ
그 바지가 짧아질만큼 나는 컸지만 엄마는 그 바짓단에
다른 천을 덧대시곤 바지를 개조해 주셨고.....
요즘 아이들이야 필요할 때면 언제고 새 옷을 사 입히는 형편이니
우리 어린 날 같은 이런 추억은 없을것 같다.
음식만 해도 냉장고에서 애들이 먹기 싫어서 안 먹지
엄마들이 얼마나 바리바리 사 넣어 두는가 말이다.....
영양이 듬뿍 든 식사는 기본이고 간식으로 또 얼마나
맛있고 고급스런 간식들이 아이들을 기다리는지...
내 어린 날에는 특별한 날이 되서야 짜짱면이면 최상급이었고
콩밭의 풋콩을 불에 슬쩍 구워주신다거나
밀을 구워서 주시곤 하셨다.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싹싹 비벼서 입술에 거뭇거뭇 해 질 때 까지
먹곤 했는데 배가 부르다기 보다는 그 행위 자체가 놀이였던 것 같다.
엄마가 집에서 해 주시던 간식으로는 호떡이면 아주 좋은 날이었고
별식으로 찐빵을 만들어 주시던 날에는 이~야~호~
부엌이 떠나 갈 듯이 환호성을 내 지르기도 했었다.
엄마는 늘 바빴었고 아버지는 늘 빈털털이셨으니까.
지금은 모두가 흑백사진 속의 가을 날의 풍경처럼
아련하게 남아있는 추억 몇 장이지만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성큼 내 곁을 찾아 들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시원하고 가느다란 바람 한 점에서도
마른 꽃잎이 구르며 내는 바스락 소리에도
붉은 고추가 익어가면서 내는 달콤한 향기에서도
어린 날의 가을냄새를 기억나게 하고
고향을 떠나기 전에 잠깐 동안이었지만 엄마와 함께
가을을 말리던 날이 그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