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내 생애 가장 큰 보너스 같으다.
해마다 더위와 싸우고 수백명의 아이들과 싸우느라
계절 감각도 없이 그냥 더워지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바빴었고
더위가 물러 날 즈음엔 계절이 바뀌어져 있었고 좀 한가해졌으니까.
등짝이며 브레지어를 한 선 따라 빨간 땀띠선이 모양처럼 둘러 쳐져 있으니
따갑고... 쓰라리고 ..그러다가 가려움에 못 견디고 손톱을 세워서
확~~긁기라도 하면 그 날 밤은 잠까지 설치게 하는 고통에 날 밤을 하얗게 세웠다.
올 해는 길고 긴 장마가 이어지면서 기온은 떨어지고 습하긴 했지만
이국에 사는 것 처럼 시원하게 지냈다.
낮선 나라에서 수련회를 하는 것 처럼 날씨가 날 도운것 같다.
연일 계속된 수련회도 다음 주에 하나만 더 하면 끝이 난다.
부산 어느 교회의 실버팀.
해마다 오는 팀이지만 아이들 수련회보다 힘들게 한다.
메뉴도 더 복잡하고 부식 양도 더 많이 해야 한다.
주문도 까다롭고 적은 인원인데도 마치고 나면 훨씬 더 피곤하다.
아이들처럼 간단한 음식도 아니고 어른들 특히나 연세가 많으신 노인들이라
무른 음식에 칼칼한 반찬...국도 엄청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해마다 다 마치고 나가실 때는 사흘 동안 잘 드시고 잘 쉬다 가신다면서
주방까지 오셔서 인사를 하고 가실 때는 그 고생이 언제냐는 듯 행복하다.
아마도 그 낙으로 또 주방에서 힘든 일도 잊은 체 룰루랄라~~~
살아 오는 동안 내가 느끼고 감사했던 순간들은 너무나도 많다.
가장 큰 기쁨이고 감격은 물론 내가 이 세상에 건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이고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겐 큰 즐거움이지만
철이 들고 내가 느끼는 기쁨들은 좀 남다르다.
난 우리 친정엄마가 우릴 버리고 도망가지 않아서 행복했다.
아버지는 군기피자로 만주까지 도망다녔던 웃기는 양반이셨기에
엄마는 만주까지 따라 다니시며 첫아들을 이국땅 동토의 땅에 뭍고 오셨고
비단이불이며 고쟁이에 지전을 깔고 박았던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돌아 오셨기에
빈털털이로 고국에 돌아 왔어도 윗 동서가 엄마아버지의 집이며 땅까지
거의 몰수하다시피 헐값으로 앗아간 뒤였으니
맨땅에서 기댈 언덕없이 벌거숭이로 다시 시작한 살림.
아버지의 사고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으시는 비운까지.
그 뒤로 아버지의 세상을 등 진 술타령은 엄마를 사지로 내 몰았고
작은 체구의 엄마는 세상 궂은 일을 다 하시면서도 우리 오남매를
고아원이나 부잣집에 버리지 않으시려고 온 몸으로 보듬으시며 살아 낸 세월이셨다.
아버지는 가정을 버리진 않으셨지만 실질적으로 경제에 도움을 주지 못하셨고
엄마가 작은 돈을 큰 돈으로 큰 돈은 부동산으로.....
그렇게 장만했던 부동산 ..지금의 경주시청 자리 옆 땅도 오빠의 사기극으로 다 날아가고
엄마는 홧병이 생기셨고 시청 옆 동네도 안 가시려 한다.
손톱이 몇번이나 빠지고 발톱이 몇마디나 다 허물어질 정도로 해서 모은 금싸라기 땅.
수천평의 노른자위 땅이 날아간 뒤로 엄마는 심장이 많이 나빠지셨다.
만주에서 잃은 아들도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아버지의 한쪽 눈이 사그라질 때도 엄마 가슴은 허물어졌고
금싸라기 땅을 팔아서 돈 한푼 써 보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남의 손으로 넘겨졌을 때도 엄마는 가슴에서 불이 확!~~확~~!! 넘어 올것만 같다고 하셨다.
엄마가 보냈던 부유했던 어린시절은 꿈속의 세월이었고
아버지도 빈농은 아니셨지만 도망자의 노년은 비참하셨다.
그 세월 속에서 엄마는 우릴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시고 품어주셨기에
텔레비젼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사연을 보면 형편이 어려워서 엄마가 두고 나갔다가
이제는 혈육을 찾는다고..그럴 때 마다 엄마한테 감사했었다.
우릴 양친부모 밑에서 길러 주심에 깊이 감사드린다.
세상에는 여자가 단 한명.
나 하나인 줄로만 알고 사랑해 주는 남편을 아직 내 곁에 남겨 주심에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
사업에 실패하고 바닥을 칠 때도 우리 사랑만은 굳건했고
가족을 생각하고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유별난 남편이
암을 이기고 건강을 되찾아 줌에도 감사하다.
하늘에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쏟아지던 마른 벼락은
오히려 우리 부부를 더욱 강건하게 만들었고
세상을 살아나가는 또 다른 시선을 만들어 주신 셈이다.
매 순간 순간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 할 것~~!!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오늘을 사랑에 후회없도록 사랑할 것~~!!
내려갈 자리가 없을 지경까지 카드빚을 돌려막기에 지쳐 갈 무렵에 발병한 암은
우리 부부와 세 아이들을 참으로 힘들게 만들었지만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내 성격은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한다거나 손 내미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우린 젊었으니까...
우린 지독하게도 사랑하는 부부였으니까....
우린 세 아이들을 귀하고 밝게 키워내야 했으니까...
잠깐만 울고 우린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주어진 시간들을 악착으로 이겨냈다.
좌절하고 넋을 놓고 앉아있기엔 너무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리 몫의 삶을 내동댕이 치는 느낌이라 무섭도록 악착같이 살아내었다.
날마다 새로운 각오로...날마다 새로운 기쁨으로
수술실에서 데려가지 않음에만 감사해서 어린 삼남매들을 시골에서 키우면서도
한자씩이나 자란 풀밭에서 막내가 뱀한테 물려서
나 보는 앞에서 싸늘하게 식어가지 않음에도 감사했다.
위로 두 딸들이 시골이었지만 다니던 학교에서 대표자리를 두 학교씩이나 해서 감사했고
꼴찌로 성적표를 받아오지 않아서도 감사했다.
남자아이 치고는 유순한 막내가 할머니들의 귀염을 한 몸으로 받으며
심성이 고운 아이로 자라줘서 감사하다.
사춘기 청소년들의 보편적인 반항이나 거친 말을 사용하지 않아서 고맙고.
비싼 옷을 사달라 떼 쓰지 않아서도 고맙다.
막내아들까지 삼남매들이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 주는데도 고마웠고
위로 두 딸들이 대학을 재수생으로 힘들게 만들지 않아서도 너무 감사했었다.
빠듯한 형편에 재수해서 더 나은 학교로 가얀다고 우기기라도 했더라면....
보장도 없는 일에 투자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지만 애들이 무난해서 고마웠다.
또 생각지도 않게 큰 딸이 좋은 가정에 시집을 일찍 가 줘서 고맙고
둘째는 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날개를 고르는 중이어서 고맙고.
이 곳에서 처음 짐을 내리고 정착하고자 할 때
부산의 남편 친구들은 모두 말렸었다.
이 시골에서 무슨 희망이 있느냐고.....
친구들은 그 때 잘 나가던 벤쳐사업의 사장님에다가
이벤트 회사 사장에 건설중기 대여사장님에
빵빵한 회사 직원에..은행원 대리까지...
그러나 16 년이 지난 오늘 날 사정은 어떻게 변해 있는가?
이벤트회사 사장은 주유소 주유직원으로 전락했고
벤쳐사업사장은 사기죄로 도망다니다가 복역하고 나오고
빵빵한 회사직원은 머리가 아파서 휴직 중이고
은행원은 지금 은행장이 되어 외국에 나가있다.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한 친구시다.
우릴 걱정했던 친구들이었는데 ...부모님 덕분에 좋은 대학을 나온 친구들이
다들 어려운 형편들이 되어 있다.
시골에서 죽지 않을 만큼 자고 죽을 힘을 다 해서 열심으로 일을 하다보니
시부모님들도 모실 수 있었고 시댁 친척분들의 사랑은 다 받았었고(ㅎㅎ)
우리 회관을 찾는 많은 분들의 지극한 사랑까지....
철따라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 부부와 아이들을 챙겨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있는 한은
내가 아파서도 안되고..내가 변심을 하고 그만 둘 수도 없으니
난 내 건강이 나 혼자만의 건강이 아니고 하루에 세번씩 우릴 위한 기도를 하시는
할머니가족들과 내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좋은 지인들을 위한 건강한 몸이어야만 한다.
팥죽 끓듯이 변화무쌍한 심보가 아니라 뚝배기 사랑으로 한 곳에 오래 있다보니
우리 아이들도 방목을 하고 키우긴 했지만 착하게 자라줬다.
조카의 옷장을 넘보며 애들을 키우긴 했지만
밝고 맑은 영혼을 지닌 고운 아이들로 자라줘서 너무 고맙다.
부모가 부유한 것도 큰 행운이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건강한 부모가 따듯한 사랑으로 키워만 줘도 아이들한테는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아닐런지....
재산의 많고 적음이 결코 사랑의 크기는 아니라고 본다.
얼마만큼 가슴으로 느겨지는 사랑을 주느냐가 문제지.
가진것을 다 주는게 아니라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게 사랑해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본다.
살아오는 동안에 내가 받은 고마운 일과 감사할 일들이 하도 많아서
난 자주자주 택배를 꾸린다.
앞치마를 입은 차림으로 온 창녕 읍내를 내 집인양 그것도 모자라
마산까지 그 복장으로 아무런 부끄럼 없이 편안하게 싸돌아다녀도
내 중심은 항상 저중심이니까 오월아..걱정 말아라.ㅎㅎㅎㅎ
택배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내가 살아가는 흔적들인 셈이다.
내가 누리는 이 기쁨과 감격을 민들레 홀씨처럼 날려 보내는 행위인 것이다.
가진 것이 많아서도 아니다.
넘쳐서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내가 느끼는 이 세상의 행복들이 받은 님들도 느껴지기를.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아름다운 감사거리를 어찌 다 나열할까?
스스로 숨을 쉬고 있는 이 자체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한 것을.....
한창 어려움을 겪던 내 어린시절에도 엄마는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빈손으로 돌려 보내시질 않으시고 쌀독의 쌀을 퍼 내려면 어깨참이 쌀독에
닿으면서도 쌀독의 쌀을 박박 긁어서 퍼 담아 주셨다.
저녁에 우린 온통 거무죽죽한 보리밥을 먹을지언정....
그래도 배 곯지 않아서 난 내 유년시절이 너무 너무 행복했었다.
엄마랑 함께 보낼 수 있었으니까.
지금 나는 그 때 엄마 나이보다 휠씬 더 유복한걸 뭐.ㅎㅎㅎ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남편도 있고
세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줬는데
그깟 택배꾸러미 몇개 더 꾸린다고 큰일이야 나겠냐구?
살아가는 감사의 표시로 작은 정성들이 날아가는 것 뿐인데...
지금은 그 엄마가 많이 편찮으시다.
옛 영화를 다시 누려 보지도 못하시고 아버지 곁으로 가실 모양이다.
수련회를 다 마치면 엄마한테 먼저 가 봐야겠다.
못난 딸이지만 하나 밖에 없는 이 딸을 날마다 그리워 하신다는데...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