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4회
꽃 피고 새 우는 날에
나는 참 지질이 복도 없는 년이다. 여자의 식도암은 남자의 그것에 비해서 15분의 1이라 한다. 그 어려운 확률 속에 내가 끼었다고? 알콜 중독자들은 식도암에 걸릴 위험이 일반인에 비해 25배라고? 그런데 나는 술 냄새도 못 맡는 알량한 주재가 아닌가. 그래. 이런저런 통계는 다 접어두고라도 식도암의 70~80%가 음주와 관련이 있다 했지. 이만하면 내가 얼마나 복이 없는 년인가 말이다. 차라리 유방암이라든가 자궁암쯤이면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나는 유방과 자궁을 소유한 확실한 여자니까. 아니, 자궁암과 유방암이 여성암 제 1위라 하니 나 하나쯤 더 끼어들었다 하드라도 그리 억울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 나이 이때쯤 되면 여유롭게 나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그동안의 고생도 즐겁게 감수했는데…….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만 나아 잘 기르자.’는 정부시책에 반기를 들고 2남 2녀를 둔 죄로, 고생을 고생이라고 말도 못하고 나를 낮추며 살아왔는데……. 내 입으로 이런 저런 고생을 했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만 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사 남매 모두를 다 대학공부 시켰으니 그 고생이 오죽했으랴 하며 혀를 찼다.
이쯤이면 내 이야기를 좀 구체적으로 해야겠다.
예전에는 배우지 못하고 배고픈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전문직에 입문하는 예가 많았다. 그러나 나는 나이 스물의 늦은 나이에 ‘황금만능’을 깨닫고 의류 업에 뛰어들었다. 나이가 많아서 어린 선배들에게 수모를 당하기도 했으나, 나이가 많아서 유리한 점이 더 많았다. 하나를 일러주면 열쯤은 알아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바닥에선 제법 고학력의 소지자로 굴림하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1년 8개월 만에 자영(自營)을 시작했다. 돈 맛에 신물이 날 때쯤의 내 나이 스물다섯이 되던 꽃다운 나이에, 독일 유학을 계획하던 대학 졸업반의 청년과 맞선을 보았다. 그이는 농촌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시골유지의 외아들로 전도가 총망 되는 청년이었다. 집안 어른들의 기대가 적지 않았고 그만큼 집안의 믿음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늦둥이 인 어린(?) 나는, 아는 이 하나도 없는 독일로 가서 살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이가 독일 유학을 포기하고 나를 택해서, 다음 해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에 결혼식을 올렸다.
여기까지 내 글을 읽은 이들은 내가 쭉쭉 빵빵의 매력 녀 인 줄로 알겠다. 그러나 나는 그이의 키 180cm에 걸맞지 않는 158cm의 단신이었다. ‘키가 그 지경이면 얼굴이라고도 좀 반반하거나. 아니면 분위기가 봐 줄만 하다든지 했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거만하고 도도하다는 소릴 종종 전해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애써 부정을 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몰골에 거만하지도, 도도하지도 않다면 어디 여자라고 하겠는가 말이지. 찍어 바르고 단장을 해봤자 나아지는 게 없어서, 그이와 맞선을 보는 자리에도 요샌 말로 ‘생얼’ 그대로 나갔었다. 그래도 그이가 독일 유학을 포기하고 나를 선택했다? 이건 그이에게 계산된 뭣인가가 있었을 것이라며 결혼 뒤에도 나는 종종 그이를 맹렬히 비난했다. 뭘까? 옳거니. 돈을 잘 버는 여자였기에? 그 당시는 맞춤 양장이 호황을 누려서 제법 수입이 짭짤했으니까.
그러나 아둔한 내가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시골이지만 그의 본가는 소위 말하는 ‘땅부자’였으니까 돈에 구애를 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계산 된 선택은 오히려 내 쪽 친정어머니셨다.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잘못 된다 하드라도, 적어도 배는 곯지 않을 것이라는 현명한 내 어머니의 계산이었다. 친정의 내 어머니는 1‧4후퇴 때 아버지를 따라 사 남매를 데리고 남하하셨다. 배고픈 피난생활에 찌든 어머니는 시골 유지의 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그이에게 아주 후한 점수로 막내사위 자리를 허락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