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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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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이야기


BY 꿈과같이 2009-01-22

 

벌써 20년이 흘렀다.

남편을 처음 만난 건 1988년 9월, 가을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늦여름의 끝이었다.

두어번의 연애를 거치다 보니 난 스물 여덟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도달해 있었고

맏딸을 치우지 못한 엄마는 전문 중매장이까지 동원해 날마다 선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즈음이었다.

이젠 나이가 차서 맘대로 고르지도 못한다고 성화를 대는 엄마 옆에서

나는 절대로 주눅 들지도, 서두르지도 않으며 결혼에 대해 숙고에 숙고를 다했다.

연애하던 사람과는 조건이며 상황따위 다 무시하고 결혼할 생각이었지만

사랑만으로는 극복되지 않은 문제들로 헤어지고 난 후 중매 결혼은 내게 참 어려운 숙제였다.

엄마는 당연히 조건들로만 상대를 가늠하려고 하셨고

나는 외형적안 조건보다는 나와 생각이 맞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지금이야 스물 여덟이면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당시 우리 엄마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보다 급한 문제였다.

숱하게 많은 선을 보고, 좋다는 사람도 꽤 많았고, 구체적으로 발전할 뻔한 사람도 몇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내 맘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불행히도....

그렇게 시간이 속절 없이 흐르고 9월 어느 날, 또 다시 맞선 약속이 잡힌 토요일.

지금은 없어진 삼일고가도로가 엄청 막혔다. 늘 그렇듯 시내 호텔에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고가도로 위 택시 안에서 이미 약속시간이 한 시간 가량 지나는 중이었다.

결국 한 시간이 넘어 약속장소로 들어가며 우리는 이미 그날의 만남을 포기했다.

로비에서 낯익은 중매장이가 달려 나오는 걸 보며 어떻게 사과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무조건 잡아 끌고 커피샵으로 들어 가가는 것이 아닌가.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깔끔하고 단정한 용모의, 전형적인 대기업 엘리트 사원 이미지였다.

나이가 나보다 6살이나 많아 조금 망설였던 그는 상당히 동안이라 다섯살은 아래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중에 그가 한 말이, 맞선 자리에서 그렇게 기다려 본 역사도 없었고, 평소 자기 성질과도 안 맞는 일이었는데

그날은 왠지 그냥 그러고 싶더랜다.

상대에 대해 특별히 기대가 컸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왠지, 그런 거 였다는 거다.

당시만 해도 어디서든 인물 빠진다는 소리는 안 듣던 나였긴 했지만

그날 남편은 시셋말로 내게 한 눈에 뿅 갔단다.

자기도 수 없이 많은 선을 보았었지만 그동안 자기가 만난 여자 중 단연 best, 으뜸이었단다.

남편이 적극적으로 나오고 나도 괜챦아 하자 정작 엄마는 시큰둥 하셨다.

시댁이 워낙 가난한 것이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서울도 아닌 인천의 13평 서민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살고 있던 남편은

직장과 학벌이 좋은 것 외에는 너무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까다롭고 예민한 맏딸이, 고생이라고는 전혀 해본 적 없는 깍쟁이가

가난하고 옹색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 못내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과 말이 통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장 혐오해 마지 않던 마초적인 남자도 아니었고

적당한 허세와 거품으로 장식된, 밑천이 가벼운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만만하면서도 겸손하고, 나이에 비해 순수하고 맑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물론 주변 사람들은 내가 결혼을 공표하자 모두 축하는 하면서도

뜻밖이라는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아마도 그간 내가 선 본 사람들에 비해 외형적인 조건이 너무 빈약했던 탓이리라.

만난 지 백일 만에 결혼하면서 사실 나도 조금은 두려웠다.

나 자신을 믿고, 내 판단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도

혹시나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그의 문제점이나 결함들이 나타나면 어쩌나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누구나 그렇듯이 우리도 신혼 초 약간의 갈등과 싸움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간이 남들보다 훨씬 짧은 편이었다.

살면서 나는 점점 남편이 얼마나 선하고 바른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17평 전세 아파트에 살면서도 나는 남편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강남에 살면서 해외여행을 다녀도 나는 우리의 낡은 포니를 끌고 지리산이며 강원도에 다니는 게 더 행복하고 즐거웠다.

젊어서였을까...아무 것도 겁 나는 게 없었고 두렵지 않았더랬다......

결혼 5년만에 남편이 최연소 임원이 되고, 2년 후 회사를 나와 사업을 시작하고,

직원 둘을 두고 시작한 사업이 워낙 밑천이 없다 보니 매달 현금 서비스 돌려 막기를 하고...

그러면서도 나는 왜 그리 걱정이 없었을까.

남편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 믿음이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던 동요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 사업은 점점 규모가 커지더니

직원이 50명에 달했고 병역 특례업체로 지정도 받고 주변에서는 완전히 성공한 사업가로 인정 받게 되었다.

십여년 사업을 하다 보니 남편이 예전과는 달리 다소 권위적인 부분도 생기고

예전의 겸손한 모습이 퇴색된 감도 없진 않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지위나 자산에 비해 착하고 유연한 사람이었다.

자기 방의 가습기 청소도 여직원을 시키지 않고 직접 했던 사람이었다.

 

아직도 나는 우리가 파산을 한 원인에 대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인터넷에 남편 회사를 치면 아직도 페이지 가득 기사와 정보가 넘쳐나고

신문이며 매체에 실렸던 남편의 인터뷰 기사며 회사 정보가  가득하다.

텔레비젼에 벤쳐기업 얘기나 테헤란로가 화면에 비치면 상채기에 고추가루가 뿌려진 듯 아리고 아프다.

회계 전문가조차 이런 케이스는 처음 본다고 한다.

물론 사업을 확장하고 영역을 넓히느라 자금에 무리가 오긴 했지만

이 규모에 그 정도 부채로 쓰러진다는 건 말이 안 된단다.

남편은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 거론하는 걸 싫어한다.

오랜 기간 신뢰해 왔던 사람의 배신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몰락하게 되었다는게

아마도 남편을 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한다는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그렇게 깍듯하고 그렇게 충성스러웠던 사람이 그런 얼굴로 돌아 설 수 있다는게

나 역시 믿기지 않고 꿈꾸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갇혀 있는 이 터널은 얼마나 길고 어둡고 추우려나....

무섭고 막막해서 수시로 눈물이 솟는다.

강해지고 싶은데,,,,더 이상 젊지 않아서일까. 너무나 두렵기만 하다....

남편을 믿고 이 시련을 넘어가야 하는데 그 사람을 바라보면 이젠 자꾸 눈물이 나려 한다.

든든하고 믿음직했던 남편의 모습이 초췌하게 야위는게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