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수기-17 딸의 꿈도 꺾이고…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은 팁도 후하게 주고 음식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사람도 많았다.
친구나 가족을 데리고 다시 나타나는 손님도 많았다.
신문과 잡지에 기사화 되기도 하였다.
그럴 때 마다 손님이 조금씩 늘긴 했으나 식당은 매달 적자였다.
손님이 많지 않으니 아홉이나 되는 풀타임 인건비가 가장 큰 출혈이었다.
알콜 중독으로 지각과 결근 그리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던 브레드, 길거리서 랩송을 부르다 경찰하고 충돌하고 결국 법원까지 가서 그 경찰의 해고를 이끌어냈다는 의지의 사나이 굿맨, 둘이서 연애를 하러 왔는지 일하러 왔는지 아리송하던 제레미와 메간. 그리고 멜릿사와 르네. 모두 보내고 종업원 수를 셋으로 줄였다.
그래도 힘들었다.
딸은 이태리에서 패션공부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많은 방황을 했던 딸이 모처럼 안정을 찾아 행복하다고 할 때였다.
아들은 딸의 감각이 우리 식당을 살릴 수 있을거라고 날더러 딸을 부르라고 하였다.
내키지 않았다.
딸의 감각이야 나도 인정하지만 뾰족한 성품 역시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딸만 뾰족한 것이 아니고 모두가 뿔 난 사람들이다.
아들과 남편, 나 이렇게 셋이서도 충분히 커다란 마찰음을 내고 있는데 딸까지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날더러 딸을 부르라는 주문은 부탁이 아니고 협박에 가까웠다.
날더러 자기만 부려먹고 딸은 공주처럼 위한다고, 내가 그러면 자기도 우리를 위해 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가진 돈을 다 쏟아부어 시작한 식당이 망하면 엄마아빠 노후가 막막한데...자기 탓으로 그리된 것이라는 중압감을 아들은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성질은 급해도 효자아들인데 잘하고 싶은 마음만큼 스트레스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아무리 협박하고 위협해도 딸을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은 오손도손 살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 때도 아들과 남편과 나 사이의 긴장이 어찌나 팽팽한지 날마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고 있었다.
아들은 우리랑 싸우고 며칠씩 가게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끼리의 갈등이 더 심했다.
아들은 남편이 가게에 나타나지 않게 하라고 남편은 아들이 가게에 나타나지 않게 하라고, 사이에 낀 날 곤혹스럽고 힘들게 할 때다.
우리가 처한 갈등과 위험에서 딸이라도 보호하고 싶었다.
딸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궁금해 전화로 자주 묻곤 하였는데, 자기는 학비를 보내주지 않으면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공부를 하든 학비가 안되면 학교를 중단하든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라고 하고 싶은데 여권이나 비자 문제가 복잡해서 선뜻 그렇게 결정하기도 어려웠다.
가능하면 딸이 공부를 마치고 원하는 일을 하게 하고픈 마음에 어리석은 짓을 하였다.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지는데, 울동서 입버릇처럼 울아들이든 딸이든 하나는 자기가 학비를 대고 싶다고 하였었다. 결혼초 우리가 맞벌이하면서 자기남편 학비를 대주어 의사공부를 할 수 있게 하고, 자기들 결혼초 힘들 때 아들도 키워주고, 우리가 분양받은 아파트도 그냥 살라고 해서 아들도 키우고 딸도 키울 수 있었다고(그 때 우리는 남편이 해외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다.)...자기는 여러가지로 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그리하고 싶다고 하였다.-
딸에게 작은엄마에게 전화해서 부탁해보면 혹시 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