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장사가 끝나면 그 날 크레딧카드로 받은 팁을 입력한다.
크레딧 전표를 번호순으로 정리한 다음 입력을 하는데 남편이 그 일을 하다 63번이 없단다.
누가 주문을 받았는지 알아봐야지, 했더니 마지막이니까 내가 주문을 받았던 때란다.
그래? 내가 어디 두었나? 가끔 주문서하고 같이 끼우기도 하니까, 그랬나... 살펴보니 없다.
계산대 옆 이곳저곳 살펴봐도 현금통을 다시 살펴봐도 없다.
남편이나 아들이 주문을 받을 때는 크레딧 전표가 간혹 없어지기도 하지만 내가 받을 때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데...
속상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남편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다.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난 할 말이 없다.
장사를 잘 한 날도 기쁘지만 팁이 많은 날은 더 기쁜데...에구, 속상해...
손님이 준 팁이 날아가게 생겼다.
건망증이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캄캄한 기억을 뒤적뒤적 천천히 다시 들쳐본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모르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본다.
아, 생각난다.
마지막 손님 주문을 받은 것은 내가 아니라 남편이다.
날더러 불고기하고 매운쏘스를 to go로 해 달라기에 주문서를 주면 되는데 왜 그러느냐고 했었지.
성미 급한 남편은 주문서도 뽑기 전에 음식부터 하라고 서둘렀었는데...
그래서 내가 투덜거렸는데...
건망증이 심한 남편은 자기가 한 짓도 내가 했다고 우기길 잘하는데, 역시 건망증이 심한 내가 고스란히 뒤집어 쓸 뻔 했다.
이번엔 어찌어찌 기억을 찾아냈기에 다행이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을까나...
남편과 나는 열 살 때 만났다.
응큼하게 그 때부터 서로를 맘에 품었다.
그런 남편은 보리밭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때 말이야, 당신이 중학생일 때, 보리밭에 당신을 데리고 가서...
아, 생각만 해도 좋았는데...
중학교 다니던 때, 한참 이성에 눈 뜨던 때, 남편은 상상 속에서 나랑 별짓을 다 했다는 말이다.
실제는 어쩌다 통학버스 속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눈길 돌려 외면하고 내숭 떨며 지낸 사인데...
남편의 선배 중의 하나가 보리밭에 몇번이나 갔느냐고 가끔 우리를 놀린다.
짖궂은 사람이니 그저 그런가보다 하였다.
오늘 아침도 남편은 보리밭 이야기를 꺼낸다.
그 때, 말이야...당신은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들었었다고...
그 때, 생각을 하면 말이야...
어제 일이 갑자기 떠오른다.
이 남자가 혹시 상상과 실제를 구분 못하는 것 아닐까...싶어 못을 박는다.
생각이 아니고, 상상이잖아...
당신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상상을 실제 있었던 일처럼 말하는 것 아니야?
혹시 상상과 실제를 구분 못하는 것 아니냐고...
뭐, 그것이 상상이면 어떻고, 실제면 어때...어차피 살 섞고 사는 마당에...
아이고, 내가 미쳐... 그럼 혹시 그 선배에게...
갑자기 그림이 그려진다.
나이가 더 들어 건망증도 더 심해지고, 사리분별력이 흐려진 남편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리밭이야기 떠벌이는 것이 아닌지...
건망증이 같이 심해진 나는 그랬었나...그러면서 앉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쑤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 할머니 얌전한 체 하면서...별 짓 다했구나...
얼마나 재미있어 할까...
그럼 나 창피해서 어쩌지? 건망증이 심해지면 창피한 것도 모를까?...
어제 주문 내가 받지 않은 것처럼 보리밭 사건은 결코 내 인생에 없었더랬는데...
아직 그리 심해지지 않은 건망증으로 지금은 분명히 말 할 수 있는데...
나중까지 해명이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