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였다.
아침 일기예보를 얼핏 들으니 눈이 온다는 얘기가
있던 것 같아 기대를 하고 있었나보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나서 환기 좀 시키려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데 정말 눈발이 나리고 있었다.
요즘 눈은 환경오염으로 색까지 변했나,
색이 노랗다. 이상하단 생각에 안경까지 끌어올리며
자세히 내다보니 길가에 황금으로 치장한 은행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은행잎이다.
벌써 눈에 노안이 들기 시작했나보다... 휴...
눈이 오면 길도 미끄럽고 다니기도 여러모로 추잡한데
이상시리 첫눈은 기다려진다.
딸과 함께 들였던 봉숭아물이 손톱의 중간을 벗어났는데
며칠 전 딸이,
“엄마는 좋겠다. 첫 눈 올 때까지 봉숭아물 남겠어서...
나는 없어졌는데... 엄마, 그럼 엄마는 첫사랑이 이뤄지는
거예요?“ 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참 무수히 많던 질문 폭탄세례들로
내 정신을 못 차리게 하던 것이 커가면서 서서히 조용해져,
살만하다 했더니 아직도 간간히 던지는 말들이 초등 1년생
철부지 정신을 못 벗어난듯하여 살짝 씩 당황을 시키고 있으니,
이런 모녀사이를 지켜보던 엄마는 딱 옛날의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셨다... 나 역시도 참 뜬금없었단 말씀...
“아영아, 엄마의 첫사랑이 이뤄지다는 것은 말이다,
불륜이란 아주 무서운 짓을 야기 시키는 것으로써,
불륜이라 함은 윤리 상 있어서는 아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로써, 에...“
11년 키우다 보니 빠삭한 가시나 속성이 질문에 질문의
꼬리가 이어질걸 생각해서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으려
든 것 없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데 눈을 말똥거리며
곁에 있던 딸래미가 시시하단 듯 방으로 쏙 들어가며
한마디 한다.
“엄마, 그냥 감옥 간다고 하면 되잖아요. 이뤄질 수 없는 사랑.
그 말씀 하시는 거죠?“
“헉!!! 야, 그럼 넌 그걸 알면서 엄마한테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말을 하냐?! 감옥 보내고 싶어서?!“
“어쨌든 봉숭아물이 손톱에 남아있으면 첫사랑 이뤄진다
잖아요. 그 말을 했던 건뿐인데...그리고 저는 엄마가 아빠랑
첫사랑 이뤄졌다고 할 줄 알았는데...에휴, 엄마는 그럼 첫사랑이
따로 있었다는 거잖아요...“
난 슬슬 아이들에게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들을 파악한 만큼 녀석들도 지랄 맞은 제 엄마를
진즉에 분석, 처리방법까지 모색해 놓은 것이 틀림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나도 뭔가 궁리에 조치를 취할 때가 도래한 듯 하다.
애견을 키우며 들어가는 돈을 아껴보겠다며
손수 미용을 시도했었다. 무식하게 용감한 나는
인터넷을 뒤져서 싼 게 비지떡이라도 좋다며 2만원하는
이발기를 사서 손질을 해주곤 했는데 조심스럽게 한다고 해도
날이 시원찮은 탓인지 아니면 기술의 부족일까 간간히 해피의
비명이 튀어나와 털 범벅이를 안고 안쓰러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를 해왔다. 이 녀석이 이제 미용박스만 봐도 오줌을
질길 정도로 공포로 떠는 모습이 미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어쩌니, 없는 집에 왔으니 우리 한번 이 난관 넘어 보자꾸나,
굽힘없이 행했는데 이 계절이 되고 보니 환기도 못시키는데
날리는 털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아서 어제는 애견 센타로
큰 맘 먹고 미용을 위해 맡기고 돌아왔다.
들판의 황금빛도 정리 된지 오랜데 도심은 아직도 은행들의
행렬 속에 온통 황금으로 치장되어 하늘을 날리고 바닥을
뒹구는 노랑 세례들로 가득 찼다. 부쩍 싸늘해진 날씨 탓에
자전거를 몰고 오던 손등이 시린 것을 참고 달리다 횡단보도
앞에서 한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작은 아이와 1학년 때 한 반이던, 큰애끼리 이름이 같았던
우리들은 말투에 넘치는 카리스마도 비슷하단 얘기를
주위에서 듣곤 했다.
10년 연배인 그녀는 가끔 모임에 술자리에 끼기는
했지만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입을 닫고 살았고 눈 꼬리가
매서워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요주의 인물이기도 했다.
한번은 그녀가 내 앞에서 말실수를 했던 탓에 불끈했던 내가
따지고 든 적이 있었고 바로 그녀의 사과를 받아 냈던 적이
있었는데 한번 돌아선 마음을 쉽게 돌리지 못하고 냉정하게
그녀를 대했던 나였다. 그런데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녀의
가정사를 접해 듣게 되었다. 말을 전한 사람 역시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목격한 경험담이라며 걱정스레 했던 말이었다.
키도 크고 덩치도 기본을 조금 웃도는 그녀가 술도
좋아하고 한 성질하면서도 남편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맞고 산다는 놀라운 얘기였다.
나와 남편의 사이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섞이지 못하는
대립상태는 비슷한 처지의 우리 같았고 그래서 왠지 동변상련의
동지애를 느끼며 지난 날 까칠하게 대했던 것이 미안해서
길가다 마주치면 전과 달리 반갑게 대하곤 했는데 그런 그녀가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서서히 잊어 갔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를 뜻하지 않게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런 반가운
마음이 내 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하게 했던 것도 같다.
피곤한 듯 푸석한 얼굴과 몸은 좀 더 불은 것도 같고 그보다
먼저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어렴풋이 남아있던 얼굴 한쪽에
푸르스름한 멍자욱과 손등에 나있던 깊게 패인 상처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못 본 척 아이들은 잘 있느냐고 여쭈니
학원도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성적이 잘 나온다며 입에
힘을 실었다.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서 한두 개 틀리는 것은 잘하는 거라기에
학원 다녀도 그 성적 못나온다며 얼마나 대견하고 뿌듯하냐고
욕심 있는 녀석들은 뭐가 되도 될 거라고, 인물도 훤하고 인사성도
바른 녀석이라 훗날 부모공경도 할 거라니 입이 귀에 걸렸다.
다른 볼 일이 없었다면 어디 들어가서 얘기라도 나눴으면 좋겠는데
급한 마음에 그렇게 우리는 추운 길 한복판에서 그래도
30분을 떠든 것 같다.
눈에 슬픔이 가득했던 그녀, 그 모습에 내가 느끼는 감정이
분명 동정은 아니었다. 연민이라고 해야 하나...
남녀평등을 주장하던 나도 나이가 들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여자이기에 감당해야하는 아픔들을 인정하게 되었다.
훗날 밥 한번 같이 먹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기고 헤어졌지만
그녀의 슬픈 눈이 하루를 지난 오늘에도 내 머리 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자존심 덩어리들이다. 열등감 뭉치들이기도 하고...
자존심과 열등감이 없는 사람들은 ‘도인’ 아니면 ‘바보’라던
어느 분의 말씀을 떠올리며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녀는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는 것 같다는 얘기가
떠올라서 그런 친구해주고 싶단 오지랖 넓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단단하게 커다란 자존심을 섣불리 건들 자신이 없어서
더 깊이는 못 들어 간 것이 나는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이리 떠들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뭐 그리 잘났다고 설치는지, 감히 누굴 다독거릴 위인이
된다고 개뿔 잘나지도 못한 것이 성인군자처럼 굴려고
하는 것인지, 내 자신이 한심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