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포부의 날개는
이 예향
서기 1960년 충남 아산의 어느 농부의 한 집에서는 따스하고 완연한 봄의 시작이 어제인듯 했는데 그 따뜻한 봄은 가고 한참 여름의 무더위로 폭폭 찌는 음력으로 윤달 6월의 여름이 왔다
한 농사부부께는 첫째는 건장한 아들을 두셨고 두 번째로는 건강한 예쁜 여아를 무사히 어머니는 순산을 하셨다
그러나 그 예쁘게 태어난 여자 아이의 신선함의 건강은 단지 몇 날뿐이었고 그 아이에게는 일평생을 몸에 장애라는 어둠의 짐을 짊어지는 눈물을 흘려야만 되고야 말았다
그 아이가 바로 나 이 예향
나는 세상에 얼굴을 내민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매우 무더운 어느 여름 날 뇌에 경기란 병마가 문을 두드리며 찾아오더니 머리끝에서 발끝에까지 온 몸에 뜨겁게 열이 나며 온 몸을 떨기시작을 하길 며칠을 하다가 열이 다 식었기에 아이가 이젠 건강해졌나 보다하고 부모님과 가족들은 한시름을 놨으나 그러나 기대하던 그 건강은 저 멀리 보내버리고 왼쪽 손과 발에 장애의 체구로 나는 인간으로서의 세상적인 삶은 시작
지금은 좋은 병원이 있어 빨리 치료를 할 수가 있으나 내가 태어날 당시엔 아픔의 치료는 침술로 많이 고침이 되어 나의 부모님께서는 이 큰 딸을 불구자로 안 키우시려고 이곳 저곳 침쟁이를 찾아가서 이 딸의 손발 장애체구를 고쳐보려고 애를 많이 쓰셨으나 그 댓가는 전혀없이 나는 부모님께 평생토록 고생하시는 무거운 짐만을 안겨드리는 딸로 살아가기
시골이라 동네 애들은 다 같이 모여서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술래잡기 등등의 놀이를 재미있게 하며 놀고 있으나 내 또래의 애들은 너 같은 병신 애는 같이 끼어 놀 수가 없다고 외면을 해 같이 노는 동무 하나 없이 이 못난이 나는 그저 애들이 노는 초가집 턱 밑에서 나는 왜 병신인가 같이 놀아주는 동무도 하나 없는 나인가 하며 슬픔의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애들이 재미있게 노는 것을 구경만 하며 매일의 시간을 동무 하나 없이 유년시절을 보냈고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으나 학교 입학을 한지 얼마 후에 충남 예산에 사시는 큰 이모께서 연락해 오시길 그 곳에 침 잘 놓는 이가 있다며 와서 침을 잘 맞아 손발을 고쳐보지 않겠냐 하시기에 그래 꼭 그 곳에 가서 이 장애의 손발을 고치고 와서 학교에 다니겠다는 큰 기대를 걸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지 얼마 안 되어 이모네로 가서 몇 달간 매일 침을 맞아 봤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이 다시 집으로 와서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는 못 다니고 초등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중학교 까지 일반인의 학교로 매일의 시간을 학업에만 열중을 했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서인지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친한 친구라고는 그 누구 하나 없이 나는 외돌토리로 학교를 다니고 말았지
공부를 잘하려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힘을 기울여 노력은 했으나 뇌에 경기의 병마를 앓아서인지 이 머리에는 기억이 이해가 전혀 안되고 아주 못해 금방 보고 듣고 배우고 읽은 것들은 잠시 그때뿐이지 이 우둔한 머리로는 책 내용의 뜻을 전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함의 학업의 실력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 2학년을 마치기를 하고 중3학년을 맞이해 1976년 내년에는 나도 여고생이 된다는 푸른 하늘의 꿈을 키우며 더욱더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그러나 내게 고등학생이 되는 파란 꿈은 갑작스런 집안의 큰 사고로 포기를 하게 되고야 말았지
그 당시에 우리 집은 큰집과 같이 쌀을 찧는 방앗간의 일을 아빠께서 큰 아버지와 같이 하셔서 두 집 식구 18명의 식구들이 먹고 살아갔는데 그만 그 방앗간에서 내가 중학교 3학년 여름에 큰 화재가 나서 하루아침에 우리 집과 큰 집은 빚더미로 인한 가난이 시작이 되어 부모님은 많은 돈을 빌려 방앗간을 새로 지어 18식구가 다시 생계를 이어가게 됐는데 그 방앗간의 화재가 난 뒤로부터 집안에 빈궁이 매우 심해져서 1975년 12월이 되어 고입시 시험을 다른 친구들을 보나 나는 머리의 둔함으로 인한 공부실력도 역부족하고 물질의 가난으로 인하여 고교생의 꿈은 사라진 상태로 중학교 졸업으로 학생의 자리는 마무리를 하고 중학교 졸업을 한 뒤의 나이가 17살이었는데 그 17살 먹은 나이부터 나는 학교도 더는 못 다니고 일자리 찾아 고향 떠날 줄도 모르는 바보멍청이로 그냥 집에서만 부모님께 얹혀서 하루 밥 세끼만 먹고 그저 라디오로 친구를 삼아 방송을 들어가며 종이에 낙서를 하길 왜 나는 이런 병신의 인생으로 태어나서 살아가야만 하나 같이 놀아주는 친구도 하나 없지 장애의 지경에서 벗어나 살수가 있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도 하나도 없는 나 아 차라리 죽어버리고만 싶구나로 부정적인 낙서만 해가며 나 홀로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며 한번가면 다시 되 돌릴 수 없는 매일의 귀한 시간을 허성세월로 나는 흘려보냈고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집안 청소와 농번기 때 밭에 가서 부모님과 같이 풀 뜯기 고추와 콩 따기 등의 아무런 보수 없는 식모가 아닌 식모로 중등학교 졸업 후의 몇 년 동안의 귀한 시간을 값없이 보내곤 했지
내 또래의 다른 애들은 학교 졸업을 한 뒤에는 각자 서울 등 객지로 나가 돈 버는 일을 하며 설이나 추석 때면 많은 선물을 사가지고 고향 찾아 부모님을 뵈러 오는 애들을 볼 때 왜 나는 이런 병신으로 태어나 하고픈 공부도 많이 못하고 돈 조차도 벌지 못하는 사람으로만 사는 나인지 해마다의 추석이나 설날이 오는 걸 나는 매우 싫어했지
지금은 하늘나라로 26살이라는 젊은 청춘의 나이로 떠난 헌원 오빠가 있었는데 방앗간이 불이 날 때 나는 중3 이었고 오빠는 고3 학생으로 그 오빠는 성적이 매우 높은 우수생으로 꼭 대학생이 되어야 했으나 갑작스런 집안의 가난으로 인해 오빠는 나와 같은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나는 장애라는 몸으로 인해 돈을 버는 일도 직장생활도 못하고 있었고 오빠는 군입대전까지는 우리 아들 딸 5남매와 큰 집의 7명의 조카자식들을 위해 불철주야로 고생만 하시는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 3년간의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자수로 공무원의 공부를 해서 은행원이 되어 인천에서 사촌 언니 오빠들과 같이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했으나 오빠는 그 직장생활은 1년도 못하고 갑작스런 뇌출혈로 1982년 10월 15일 밤11시에 26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나의 하나뿐인 헌원 오빠는 이생을 마치고 말았지
불효라고는 한번도 크게 안 한 그 큰 아들을 갑자기 잃은 부모님은 눈물을 많이 흘리셨는데 나는 아빠 엄마가 눈물을 많이 흘리시는 모습은 오빠의 죽음에서 처음 보았고 나로서는 부모님 다음에 의지할 사람은 오빠였는데 그 오빠를 잃고 나니 왜 나는 하나뿐인 오빠 마저 내 곁을 떠나고 또 다른 어둠의 사람으로 나는 살게 됐나 하며 내 자신을 스스로 원망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내 어릴 때의 꿈은 의사가 되어 나 같은 불구자들을 고치는 훌륭한 의사가 되고픈 작은 소망과 글이라도 잘 쓰는 사람이 되려는 문학의 꿈으로 살아오다가 오빠를 잃은 뒤로 부터는 더더욱 매일의 날을 연필과 종이를 손에서 떼지 않고 글을 쓰는 습작을 적극적으로 시작했는데 맨 처음으로 내가 직접 써본 글은 오빠를 오빠가 아닌 사랑하는 님으로 여기고 오빠가 세상의 눈을 감은지 한달 후인1982년 11월에 “시월에 가신 님이여” 라는 제목을 가지고 처음으로 자작시 쓰기를 시작을 해 그 뒤로 지금까지도 열심히 신앙 시, 세상 시, 노래 시 등을 써가며 많은 문인들의 글들도 보며 노래를 불러가며 다소나마 마음에 위로를 받으며 지금까지 살고 있는 나
나에게 좋은 친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친구를 만났는데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을 준지 며칠 후에 그 당시에는 우리 마을에는 교회는 없었고 우리 동네에서 약 오리 길의 이웃 마을 교회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여름성경학교가 있다 해 친척 언니와 친척 동생들과 같이 처음으로 교회로 발길을 돌려 다정한 친구이신 사랑의 예수님을 만났지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을 한 것인데 그러나 신앙생활이라고는 그저 주일마다 성경찬송가책만 들고 건성으로 교회만 다녀 올뿐 참 믿음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신앙생활은 계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던 나였지
다행히 11살 때부터 시작을 한 매우 부족한 그 신앙이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의 보호가 나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이며 내가 좌절 절망 속에서 견뎌 낼 수가 있었고 죽음의 고비를 많이 넘겨 왔고 겪지 않았어야 할 처지에서 참아내기가 매우 힘든 큰 고통이 와 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날도 자주 오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수호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나의 그 흉한 짓을 막아주셔서 오늘이 오기까지로 나는 생을 지탱해 나가고 있는 것이지
나이는 점점 먹어 가는데 그래도 불행 중 다행히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도 나이처럼 점차로 좋은 쪽으로 커왔는데 오빠를 잃은 뒤에 친구조차 하나 없는 나의 이 외로운 지경에서 벗어날 길을 없을까 해 하나님 방송인 기독교 방송과 극동방송의 장애인 프로그램에 펜 벗을 찾는다고 사연을 보내니 부여와 서울 경상도 등 이곳 저곳에서 많은 장애우들이 친구하자고 편지를 보내와 받아보다가 지금은 충남 밀알 장애인 선교부로 바뀐 그 당시에 충남 부여에 예수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사랑의 울타리 장애인 신우회\"라는 장애인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을 매월 갖는다고 해 부여로 사랑의 울타리 신우회 모임에 참석을 시작 해 펜 벗으로 만나던 남편인 이 인구씨도 다른 많은 울타리의 친구들을 만나서 마음의 위로를 많이 받아 가고 있던 중 나에게 난생처음 직장인이 되는 문을 하나님이 열어주셨지
내 생애 처음 직장인이 된 것은 앞으로는 더 이상은 부모님께 얹혀서는 먹고 자고 노는 삶은 싫고 내 스스로 일을 해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죽기 전에는 다니지 못한 고등학교를 꼭 다니겠다는 그 꿈도 풀고 이 장애의 어둠을 극복을 해 내 힘껏 잘 살아 갈수가 있게 돈 벌을 일자리를 달라고 내 나이가 28살인 1987년 7월1일부터 일주일간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오전11시에 글로 써서 하나님께 작정기도를 시작을 했는데 그 기도가 4일만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첫 직장인이 되는 기쁨의 날을 주셨지
그 당시에 사랑의 울타리 장애인 신우회의 같은 회원인 공주에 사는 김 경자 자매님이 경기도 성남에서 가방공장을 다니고 있는데 나도 와서 같이 일을 하자는 서신으로 연락을 받고 나는 곧 바로 난생처음 직장 생활을 1987년 7월6일부터 다니게 되어 난생처음 다니는 이 직장 생활 나는 영원히 한다는 마음에 기쁨으로 즐겁게 힘을 다해 일을 했으나 그러나 처음 다닌 그 직장생활은 1988년 6월 18일자로 마침이 되었는데 직장생활을 내 생애 처음으로 다닌 그 공장에서는 나의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일 년을 한 달 앞두고 나를 처음으로 직장인으로 만들어준 김 경자 자매와 나는 나가달라고 해 다시 실업자가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와 다시 놀부의 허무한 나날로 지내다가 다시 실업자가 된지 석 달 후에 부여 사랑의 울타리 장애인 신우회 모임에서는 같은 회원인 뇌성마비 장애인인 이인구씨와 결혼을 해 살라고 말하기에 부모님과 가족들과 상의를 하니 부모님과 가족들은 어찌 너도 몸이 불편한데 너보다 더 심한 남자와 어떻게 살아 갈거냐며 나중에 후회말고 포기하라고 반대를 하셨지만 나는 그저 그를 인간으로 보기는 나보다 더 심한 장애 몸을 가졌고 물질도 가난하기 무능력자 등등 보잘 것 없는 사람이기는 하나 단지 하나 맘에 드는 것은 두터운 믿음 하나만을 바라보고 나는 부모님과 가족들의 극구반대를 외면하고 1988년에 9월에 내 친 가족은 그 누구 하나도 없이 외롭게 결혼을 해 결혼을 한지 1년 뒤인 1989년 11월에 하나님이 예쁜 딸 정은이를 건강한 선물로 주셔서 그 애의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며 살다가 어느 듯 딸 정은이가 두 돐이 다 되어왔는데 1991년 11월 8일 월요일 딸 정은이의 두 번째 생일을 3일을 남겨놓고 나에게는 큰 불행의 시간이 찾아왔지
딸 정은이는 두 번째의 생일 3일을 앞두기 까지는 이 엄마 아빠의 장애 체구를 안 닮고 순둥이로 정상아로 그리 큰 아픔은 없이 잘 자라 주다가 두 번째 생일을 사흘을 앞에 둔 1991년 11월 18일 정은이에게 이 엄마가 앓아서 장애가 된 뇌경기라는 병마가 찾아오고야 말았는데 병자가 되기 전날이 마침 주일이라 나의 딸 정은이는 이 엄마와 아빠와 같이 교회로 가서 예배를 잘 드리고 와서 놀다가 씻고 저녁을 잘 먹고 밤9시가 되어 이 엄마의 자장가 노래 소리에 맞춰 꿈나라로 갔는데 그날 밤이 아이의 건강한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지
다음 날 아이는 아침 9시가 되어도 안 일어났는데 나는 그저 어린애니까 늦잠을 자는가 보다하고 아무런 걱정도 없이 태평하게 있었는데 그 당시에 우리 집은 충남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용골이라는 산골 마을에서 구멍가게를 하며 살아갔는데 동네 아줌마가 물건을 사러왔다가 순둥이 정은이는 어디에 있냐 하시기에 아직 잔다니까 그 아줌마는 자고 있는 아이를 보더니 아이는 늦잠을 자는 게 아니고 경기로 인해 못 일어나고 있는 거라며 이 어미 아비의 힘으로는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갈 힘이 없어 동네 사람의 힘을 빌려 이웃 동네에 침을 잘 놓는 이가 있다해 가서 침을 맞혀 봤으나 아이는 안 깨어나 그 당시에 부여군내에서는 제일로 큰 병원인 성요셉 병원과 한의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해도 아이는 안 깨어나 논산 백제 병원으로 가서 이틀을 입원해도 의식불명 환자로 있다가 더 큰 병원인 대전 충남대학병원으로 옮겨 여덟 달 동안 입원치료를 해도 의식을 못 차리고 그 뇌경기병을 영영 못 이겨내고 병원에서 환자로 퇴원해 집에서 몇달을 앓고 있다가 같은 교인인 여자집사가 세상 병원에서 못 고치는 아이를 믿음의 병원이라 할 수가 있는 한 기도원으로데리고 가서 고쳐보자 해 1993년 2월 1일 날 경기도 포천에 있는 큰 기도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딸아이는 그 기도원으로 간지 나흘째인 1993년 2월 4일 입춘 날에 나의 하나밖에 없는 딸 정은이는 그 기도원에서 구름을 타고 주님나라로 보내버린 정은이의 부족한 엄마인 나였지
딸아이를 잃은 뒤로 다시 아이를 가져 봤으나 유산의 슬픔을 겪는 등 나에게는 정말로 자식 복 조차 없는 생활은 더 어두워지고 남편이란 이는 툭하면 나의 단점만을 들추어내며 신경질만 내기도 하며 돈만 다 써버렸다 뭐라 등등 남편한테 괴로움을 당할 때마다 결혼한 걸 후회하며 그 옛날 부모님의 말씀이 옳다 왜 이 길을 택해 고생을 하뇨 하며 나는 이리저리 사람으로의 삶이란 행복해요 좋아요의 인간적이란 복은 그 하나 없이 나는 슬퍼요의 죽지 못해 마지못해 벗어나지 못한 채로 긴긴 세월을 살아온 나
아이도 없고 집에서 그저 글이나 쓰는 일만 하며 지내다가 세월이 점점 흘러가자 뭔가 돈이나 벌어 쓰는 일을 하며 살려고 리어카에 건빵 과자 양말 수세미 타올 등등 생활 용품 자판 장사하기 시작을 했는데 장사하는 자리는 주로 시내버스 타는 곳에서 했는데 장사를 하며 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고 어디 가는 버스가 왔다고 일러주며 보따리를 차에 얹어주면 많은 분들은 고맙다하며 내 물건도 팔아주는 등 삶에 조금씩 생기를 느끼며 지내다가 나에게 두 번째로 직장인의 길 문이 열렸는데 나 같은 사람이 다닐 직장은 없나하며 장사하면서 신문들을 자주 보곤 했는데 2000년 10월 논산 교차로 신문을 살펴보니 논산에 있는 그릇을 만드는 플라스틱 공장인 대원산업에서 장애인 사원모집이 있어 찾아가니 나오라고 해 두 번째의 직장생활을 2000년 10월 23일부터 다니길 시작했으나 그 공장은 장애인을 채용하면 정부에서 돈을 보조 받는다는 걸 알고는 여러명의 장애인을 데리고 일을 시작하길 처음에는 대우를 잘하며 매월마다 봉급을 잘 주더니 서서히 장애인 사원에게 줄 봉급을 다음 달에 같이 준다며 몇달간의 보수를 밀어오더니 끝에 와서는 사장이란 사람은 우리 사원들에게 줄 모든 봉급의 돈을 횡령을 해 도망을 가서 두 달간의 보수를 받질 못하고 두 번째의 직장 생활은 5개월만인 2001년 3월에 마치고 또 다시 리어카로 자판장사를 하며 다시 다닐 직장은 없는가 하고 교차로 신문에서 사원모집 광고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를 5달 후인 2001년 8월이 왔는데 신문을 보니 논산에 있는 옷을 만드는 인성물산이라는 공장에서 장애인을 채용한다기에 2001년 8월 14일부터 세 번째의 직장인이 되어 다녔으나 그 직장에서는 내가 들어간지 5달만에 그만두라 해 2002년 1월에 또 다시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지
인성 물산으로의 직장다님을 정리한 후에 다시 직장인이 되고픈 맘은 늘 있으나 다닐 곳도 없고 설사 다닐 곳이 있다 해도 기초 수급자인고로 직장이나 장사라도 한다면 정부 측에서는 기초수급자라고 내 스스로 일을 해 돈을 벌어 쓰지 못하게 해 그저 정부보조금이나 받아가며 놀고 살아야만 하는 나를 비롯한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장애인들의 현실
지나간 어제의 과거의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가 없는데 역시 나이도 다시 되돌려 받을 길은 없는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온 삶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지난날의 시간을 회상해 본다면 인간으로서의 낙이라고는 즐거움도 행복이란 큰 기쁨의 삶이라고는 크게 그 하나도 그 어디가도 찾아 볼 수 없는 나의 지나온 허무한 인생
일평생을 장애 체구로 살기, 물질 가난, 돈을 벌어 쓰는 좋은 재능하나 못 갖고 있기, 딸과 오빠를 잃기, 부모님 편히 한번도 봉양 못하기, 내게 주어진 사람으로서의 역할 한번 제대로 못하기 등등 정말로 인간으로서의 삶 자체가 값어치는 하나 없이 한없이 나약하며 지겹게만 살아온 나
아마도 손발 체구는 장애 몸이라 어쩔 수 없다 하겠지만 몸의 최고의 보배인 이 머리만이라도 지혜명철의 영특한 머리라면 지나온 귀한 시간들을 허성세월로 안 보냈을 것인데 어째서 인간으로 태어나길 온전한 사람이 못되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다 장애의 몸이며 심신까지도 장애를 지니고만 사는 인간으로 나는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까하며 한탄만을 하며 살아온 나
지금까지 살면서 다만 인간으로의 만족함이 약간 있었다면 학교 다닐 때와 세 번의 직장생활과 딸 정은이와 헌원 오빠와 같이 살던 때와 몇 번의 글 당선이 되어 상금과 상품 받기, 장애인 책자인 솟대문학에 내 본인의 시가 실린 것, 논산 교차로 신문에 내 본인의 시가 몇 번 실린 일 등 단지 몇 가지만 약간은 즐겁게 기쁘게 웃음속에서 살아온 나의 인생의 시간들
운전면허를 따서 자가용을 몰고 다니기는 아주 재미가 있는데 운전면허를 따기 전에는 이 같은 장애 손발로 운전을 할 수가 있나 그저 운전하는 이들만 보면 부러워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운전면허를 따게 용기를 준 사람이 있는데 같이 교회를 다니던 임 인수 집사님으로 그 집사님에게 왜 나는 운전면허도 가질수가 없나 하소연을 하니 그 집사님은 말하길 아니야 이 집사님도 면허를 딸수가 있어 하기에 1996년 가을에 운전면허 책을 사다가 독학으로 공부를 해서 학과시험을 봤으나 기억력 이해력이 역부족해 첫째 둘째 세 번째 까지도 학과시험 실패보길 문제 중에 한 두 문제가 틀려 탈락을 했다가 하나님께 작정기도를 일주일간 낮 11시에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한 뒤에 네 번째 학과시험을 보니 합격의 기쁨을 하나님이 주셔서 학과시험 통과는 했고 곧 바로 부여 운전학원에 가서 장애인을 위한 운전교육을 하느냐 물으니 그 학원에서는 못해준다 해 이른 아침에 충남 보령시에 있는 장애인도 교육시켜준다는 동양운전학원으로 가서 교육을 받고 와서는 낮에는 자판장사도 하며 네 번째의 학과시험을 볼 때처럼 낮11시에 작정기도 하길 실기 운전 시험을 한번에 합격을 해달라고 기도한 뒤에 운전 교육을 받은지 한달도 안되어 충남 예산군에 있는 운전면허 시험장으로 가서 시험에 응하니 \"합격입니다\" 라는 축복을 1996년 11월 19일에 하나님이 주셔서 실기시험은 한번에 운전면허를 획득을 하고 운전면허를 딴지 2년 후인 1998년에 티코라는 오토 차량으로 처음으로 차를 몰고 다니기를 시작해 지금까지 승용차로 자가용을 내가 직접 운전을 하며 새벽부터 교회도 다니고 있고, 연로하신 부모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큰 병원에 가신다 하면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도 다니고 있고 , 장애인 복지관도 타고 다니기 등등 여기저기를 차를 몰고 다니면 기분이 왠지 많이 즐겁기
앞으로 나의 남은 생애에 하려는 꿈은 많으나 대표적인 큰 소망은 기억이 이해가 부족한 머리가 기억이 이해가 잘되고 기억을 이해를 잘하는 아주 좋고 좋은 지혜명철의 머리로 영특하게 잘 돌아가는 똑똑한 머리로 치료가 되어서 못 다닌 고등학교 대학교의졸업장을 검정고시 보다는 야간 학교로라도 고3년과 대학교를 정규적으로 다녀서 졸업장을 가지는 것이며, 계속적으로 좋은 글들을 더 잘 쓰기도 하며 지금까지 써온 자작글들을 가지고 책자를 만드는 일, 하나님 찬양과 세상노래를 작시작곡을 해 잘 부르기,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기 등으로 장애의 어둠을 극복할 수가 있는 예술가로 뛰어 다니며 활약을 하는 일, 세상은 컴퓨터 시대인 만큼 컴퓨터로 하는 모든 일들을 다 잘해 강사 자격증의 날개를 달아 이리저리 내 주변으로 날아가서 나보다 어려운 이들을 위한 봉사자가 되는 것이 나의 작은 포부
이 나의 작은 포부의 꿈은 말이 씨가 된다 한 것처럼 부정적인 말은 않고 긍정적인 말만 하면서 하나님께 쉼없이 기도 찬양하며 많은 분들의 중보기도 속에 열심과 힘을 다해 노력에 노력을 한다면 승리의 그 날은 올 것이다
지금 나는 그동안 낙이 없고 보람 없이 허랑 방탕하게 살아왔던 지나온 어둡고 캄캄한 인생의 과거는 저 멀리 지옥으로 다 떠나보내 버렸고, 지금 나는 희망에 찬 종소리를 치며 일어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잘되게 해달라고 매달려 기도도 열심히 하며 할 수가 있거든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하신 말씀 등등 큰 힘이 되는 성경귀절을 머리로 맘으로 눈으로 입으로 그려가고 있고, 할수있다 해보라 등등 하나님 찬양도 부르며, 해뜰날 등 긍정적인 세상노래도 내 마음에서 내 입슬에서 떼지 않고 불러가며 애를 써 가고 있는데 그 애쓴 좋은 결실의 열매는 그 언젠가는 나에게도 기쁨이 넘치는 영광의 삶 아름다운 인생의 행복과 사랑 향수의 냄새를 내 품겨가며 나날나날을 초지일관 하늘과 땅만큼 승리의 그 날이 오리라고 확신을 하며 나는 오늘도 살고 있고, 매일 이른 새벽 4시가 넘어 잠자리에서 일어나 첫 시작을 교회로 가서 찬양하며 말씀 봉독을 하며 기도로 오늘의 일들을 모두 예수님께 맡기고 집에 와서는 매일 아침마다는 파란 하늘을 보며 하늘보고 말하길 오늘도 당신 하늘처럼 낭패와 실망이란 어리석음 없이 항상 푸르고 활기차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꿈을 펼치고 승리의 기쁨의 노래를 즐겁게 불러가며 감사로 살아가는 내가 되게 해달라고 외쳐대기로 하루의 시작을 하고있고, 해가 저문 저녁이 되어서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아 오늘도 네가 나를 어두운 슬픈 운명 없이 파란 하늘 너처럼 영광되며 환하게 마무리를 하게 잘 지켜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오늘도 무사고로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로 나의 나날은 이어가고 있지 .
p.s.
이 글은 지난 2008년 5월달에 부여 지체장애인 주최로 열린 종합 예술제 백일장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