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재잘거리는 것을 오랫만에 들었다.
엄마와 딸의 관계라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도 그 중의 하나에 속한다.
물론 여자끼리니까 통할 때도 있고 서로 사랑하기도 하지만 아픔이 있다는 말이다.
딸을 임신했을 때, 우리의 결혼생활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술집을 한다는 친구집에 자주 들락거렸다.
늦게 오는 날이 수두룩했고, 술에 취해 집을 못 찾고 헤매다 얼어죽을 뻔 했다는 날도 있었고, 밤을 새고 아침에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병원에 가서 딸을 지우고 남편과 이혼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아들이 있었다.
딸을 낳고 나서도 남편의 방황은 그치지 않았다.
새벽에 들어 온 남편의 와이셔츠에서 루즈 자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연년생 아이를 키우며 시동생들 학비를 위해 맞벌이를 하던 상황에서 많이 야속했다.
딸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가르치던 아이들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을 갔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을 향해 구불구불 경사진 길을 오르면서 내리면서 그만 낭떨어지로 몸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물론 갓 태어난 딸, 두 돌이 가까워지는 아들을 두고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딸이 백일 무렵 장중첩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면서 남편의 방황은 진정이 된 듯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 사이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그 후에도 남편이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간 적도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도 남편이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나보다고 느끼는 때가 많았다.
지금이야 남편과 맞서 악다구니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그시절 나는 말대꾸도 잘 못했는데 말이다.
부부사이가 삐걱거려도 시간은 흐른다.
아이들이 세살, 네살이 되고 남편은 언어연수하러 미국으로 떠났다.
언어연수하러 우리보다 육개월 먼저 미국에 갔던 남편은 많이 외로웠단다.
가족에 대해 아내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그만큼 많았다고 한다.
육개월 후 아이들을 데리고 간 내게 남편은 비로소 그동안 날 힘들게 했던 이유를 말했다.
우린 초등 때 같은 교실, 같은 선생님 아래 공부했고 그 때부터 서로를 마음에 품었던 사람들이다.
남편이 몇 번 마음을 표시했지만 새침했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외면하며 지냈다.
남편은 서울로 대학을 가고 나는 지방도시에 남고 그래도 우린 데이트라는 것을 시작하였다.
둘 다 가난해서 전화도 없던 때, 서울과 전주 사이가 미국과 한국의 거리 만큼이나 멀리 느껴지던 때였다.
둘이서 사랑싸움을 하고 헤어지면 화해하기도 어려운 때 사랑싸움을 하였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 선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날 납치하다시피 하였다.
그 사람과 만나면서도 남편을 잊지 못했고 삼 년 후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되어 아니면 그 사람의 변명이었는지 모르지만 헤어지게 되었다.
마치 지켜보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남편이 다시 다가왔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처음부터 우리 사이를 아는 남편의 친구들도, 우리 가족들도 모두모두 반대였다.
사랑에 눈 먼 나는 귀 기울이지도 않았지만 내 친구들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나는 행복하기만 하였다.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 다시 딸을 임신하기 전까지 동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행복했다.
갈등들이 있었지만 사랑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편도 행복했단다. 내가 딸을 임신하기 전까진 그저 행복했단다.
그런데 연년생으로 딸을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머릿속에 결혼 전 반대하던 남편친구의 말이 떠올랐단다.
몇 번이나 애를 뗀 줄 알기나 하냐? 그 말을 머릿속에 떠올라 지워지지 않더란다.
그것이 힘들어했던 이유인데 이제 그런 것에 상관없이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어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내게 말하지 않았던 다른 것들도 말했다.
결혼하고 찾아간 친정집 동네에서 만난 아주머니 하나는 **하고 잘 산다며...하더란다.
그 만큼 남편 아닌 다른 그 사람과 나 사이는 소문이 나 있었던 거다.
시어머니도 어디서 듣고 남편에게 묻기도 했다는데 남편이 뜬 소문이라고 얼버무렸다고 했다.
그사람과 내가 갔던 여관이 하필이면 남편의 고등학교 동기네 소유였단다.
남편의 친구는 내가 누군지 알았고,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면회를 간 그사람의 군대 동기중에는 남편과 나의 초등동기가 같이 있었단다.
이리저리 거미줄처럼 얽힌 줄을 타고 그 사람과 내 이야기는 원치 않아도 남편의 귀에 들어갔나 보다.
소문은 입과 입을 건너 갈 때마다 부풀려지는 속성이 있으니 그 속성대로 부풀려져서 남편의 귀에 들어갔댄다.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도 남편은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기에 내게 다시 접근을 한거란다.
그 사람과 내가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적도 있단다.
우리가 살던 도시가 좁긴 했지만 세상 정말 좁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참 우습다.
남편의 고백으로 우리는 다시 행복해져야 하는데 사실은 그 때부터 내 마음 속에 지옥이 시작되었다.
내 인생에서 그 부분은 남편에게도, 아니 남편에게는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으면 했던 부분이었나보다.
남편이 그리 샅샅이 알고 있는 줄 알았더면 결혼하지 않았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하고의 연애사건은 나하고 하루도 떨어져 지내지 않았던 대학교 때 단짝친구에게도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 친구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듣고 와서 날더러 어쩜 그럴 수 있느냐고, 배신감 느낀다고 화를 냈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깜깜한 터널 속을 울면서 혼자 걸어간 것 같다.
강제로 어쩔 수 없이 당했노라고 말하면 여자의 몸가짐을 비난하던 때였으니 어떤 말도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나를 가르친 교수의 아들이었다.
그가 군에 갔을 때, 그 교수는 물론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였지만, 아들 대신 날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자기 사무실로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논문쓰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하루라도 빠지면 그 이유를 묻는 바람에 내겐 자유라는 것이 없었다.
그동안 감추고 살았던 내 분노와 슬픔이 남편의 고백을 듣고 나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었다.
남편이 미웠다.
날 속인 것만 같아 미웠다.
결혼해선 안되었는데...하는 생각도 들고, 알고서 결혼했으면 그만이지 결혼하고 나서의 방황은 뭐야, 하고 화가 났다.
남편이 말만 퉁명스럽게 해도 이혼하고 싶었다.
엄청 성미급하고 말 예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남편인데 이혼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남편이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을 그렇게도 모르겠냐고 했지만 나 모르겠더라.
정말 모르겠더라.
울딸은 남편을 닮았다.
외모도 많이 닮았지만 성품은 더욱 닮았다.
날 닮아 맹한 아들처럼 순하지 않아서 키우는 것이 힘들었다.
남편을 닮아 예민하고 세상적인 욕심도 많아 뭐든 잘했다.
나는 비겁한 사람이다.
남편을 향해 다 쏟아내지 못한 분노를 때로 딸에게 쏟았다.
잘못하는 줄 알면서, 미안한 줄 알면서 멈추지 못했다.
어려서 잘 재잘거리던 딸이 크면서 말이 없어졌다.
고등학교 다니던 때는 많이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자존감이 엄청 낮다고 하여 날 당황하고 죄책감에 젖게 하였다.
공부도 잘하고 이쁘고 어디가나 인기있던 딸이 자존감이 낮다니...아무도 모르는 그 이유가 나는 짐작되었다.
이태리로 패션공부를 하러가서 딸은 처음으로 행복했단다.
전화로 인터넷으로 나랑 재잘재잘 이야기도 잘해서 내 미안한 마음을 씻어주기도 하였다.
식당을 처음 열었던 때, 힘들어서 딸은 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와야 했다.
하고 싶었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고 왔지만 처음엔 열심히 식당일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충돌하기 시작했다.
딸의 마음에도 맺힌 것이 많았으리라, 엄청난 분노를 쏟아내었다.
우리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딸을 비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힘들어도 지은 죄가 있는 나는 그리 못한다.
싸우면서 나도 울었다.
울면서 엄마가 이래저래 잘못했노라고 고백했다.
딸은 이제서야 자기가 왜 그리 자존감이 낮았는지 이해가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서먹한 채로 뉴욕으로 갔다.
해가 바뀌어도 또 바뀌어도 우리 사이는 여전히 서먹서먹했다.
어제는 딸이 전화를 통해 다시 재잘재잘 이야기를 한다.
행복하단다. 대학교를 졸업 못했어도 졸업한 또래보다 돈도 더 받고 인정도 받고 있으니 괜찮단다.
가슴을 쓸어낸다.
딸아,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