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공항에서 포옹 시간을 3분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02

택배를 받고


BY 박 소 영 2008-03-02

택배를 받고

 

박 정 애

 

1층 현관에서 호출 신호가 온다. 택배가 왔다고 문을 열어 달란다. 현관 개폐기를 눌러놓고 남편생일날 부쳐온 택배가 잠시지만 궁금스러워 그새를 못 참고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택배원에게 어디서 온 거냐고 물으니 완도에서 박정애씨에게 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명절 때마다 나의 옛 직장에서 보내주는 선물임을 알았다. 남편 생일날 나의게 선물이 온 것이다. 옛 직장에서 보내주는 선물을 받을 때마다 나는 왠지 남편에게 뽐내고 싶어진다. 학교에서 퇴직한 남편 직장은 그날로써 끝이다. 10년 지나도록 옛 사원에게 잊지 않고 선물을 챙겨주는 직장을 남편은 너무 부러워한다.

 

택배라는 말을 듣고 남편은 은근히 생일날 자기에게 부쳐온 거라고 기대를 걸었는데 아내의 직장에서 왔다는 말에 약간은 실망한 표정이고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내용물을 하나하나 남편 앞에 내어 보이며 함빡 웃음을 머금고 설명해 주었다. 살아가면서 나를 기억해 준다는 건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더구나 요즈음 같이 메마른 세상 인심 속에 지나간 사람을 챙겨 선물까지 보내 준다는 것은 아들 며느리에게도 자랑거리다.

 

떠나온 허전함에 처음에는 내 자리를 잃어버린 듯 허둥거렸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당당한 안주인의 자리에서 어른 노릇을 하고 있다. 어느 강연회에서 ~답게 ~노릇 하기가 참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답게, 어른답게, 아내 노릇, 부모 노릇, 그 어려운 과정을 세월이 지나니 어설프지만 자연스럽게 내 자리로 받아드려 진다.

 

~답게와 ~노릇을 확실하게 하도록 밀어주는 노년의 힘은 30년을 하루같이 몸담아온 직장 덕이다. 25일과 말일이 되면 내 통장으로 들어오는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은 노후를 불안하지 않도록 잡아준다. “아버님 어머님이 부러워요.”라는 며느리는 은연중 비교가 되는 친정 부모님 염려하는 소리다. 더러는 젊었을 때 잘 나가던 친구들도 나를 부러워한다. 아이들을 떼놓고 눈물을 짜던 나를 안쓰럽게 여기던 친구들이 미래를 준비할 줄 안 친구였다고 띄워 준다.

 

무슨 힘일까? 나의 직장이 나를 종신토록 월급쟁이로 만들어 주었다. 월급을 받는다는 것은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설거지를 하고 손녀와 놀아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능력을 인정해 나라에서 돈을 준다. 설을 열흘 앞둔 남편의 생일날 받은 선물 속에 내 젊은 날이 숨 쉬고 있다. 찾아주고 기억해 주는 이가 점점 줄어드는 나이다.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내용보다 삶의 충전이다. 요번 선물은 김, 멸치, 다시마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이다. 자랑이 하고 싶어 아들네도 주고 싶어진다. 설 선물이 아니라 오늘 남편의 생일선물이다. 며느리에게 바깥 시어른 생일이라고 부쳐준 선물이라고 하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째 어머님 직장에서 아버님 생일선물까지 챙기느냐는 눈치다. 직장을 자랑하기 위한 거짓말이 신이 나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같은 동료와 긴 전화를 나누는 것도 선물 받는 날 수다다. 직장에서 받은 공짜선물은 받아서 부담되는 선물이 아니라 한없이 기쁜 선물이다. 선물의 대부분은 받는 날 갚기 위한 부담을 안는다. 그러나 옛 직장에서 주는 선물은 지나간 세월의 추억과 젊음을 함께 부쳐주어 떠나온 동료끼리 고마워하고 즐거워하며 된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직장동료와의 만남은 직장을 연결해 주는 고리다. 다음 달 만나는 날은 오늘 받은 선물이 화두가 될 것이다. 노년은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며 지나간 추억들을 더듬으면서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손녀 얼굴에서 아들의 옛 기억을 더듬는다. 남의 손에 자란 아들은 종일 엄마를 기다리다 감기는 눈을 참지 못해 방금 잠이 들었는지 퇴근한 엄마의 작은 음성을 듣고 화들짝 잠에서 깨어 품 안에 달려들었다. 지금 손녀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제 집에 가자고 보챈다. 손녀가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이 아들의 음성으로 들려온다. 아들이 아닌 손녀를 품에 안고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나는 아들의 냄새를 맡으니 코끝이 찡긋하다.

 

오늘 나는 후배들이 보내준 정성에서 옛 동료와 지냈던 직장 냄새를 맡는다. 끈끈하고 진한 사람 냄새를 맡는다. 흩어졌던 그리움들이 추억의 향기가 되어 내 몸속으로 스며든다. 힘들었던 지난 세월이 택배를 받는 순간 아름다웠던 과거로 기억이 되어 가슴 찡한 추억들을 안고 지나온 삶들을 토닥거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