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물고기 우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02

나이값


BY 진실 2008-01-17

< 나이값 >


우리가 꽤 자주 쓰는 말가운데 \"나이값 좀 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대개 훈계조의 의미로 쓰이곤 하는데
\"너도 이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철이 들어야 하지 안겠느냐\"
는 뜻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말 가운데 은연중 우리의 외모를 빨리 겉늙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쉬 답답한 보수주의자로 만들어 버리는
무의식적인 세뇌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나이는 안 먹을수록 좋고 마음은 어릴수록 좋다.
늙어가는 외모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적어도 언제나 젊음인채로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외모 또한 마음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어서
전혀 안늙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마음 먹기에 따라
훨씬 젊어보이게 만들수가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지금 \'나이값\'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퍽이나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만일 내가 나이값에 걸맞는 삶을 살아왔더라면
진작에 자식을 가진 아버지가 되었어야 했을 것이고,
늦은 나이에 야한 내용의 글,
아니 가식적 교훈이 배제된 내용의 글을 쓰려고
애쓸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과거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일찌기 장가를 들어
지금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과거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일찌기 장가를 들어
지금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허구한 날
공자왈 맹자왈 훈계조의 넋두리나 중얼거려 가며
이른바 \'웃어른\'으로서의 위선적으로 포장된 행동만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상상만 해도 끔찍스러운 일이다.

수년 전 일흔 살이 넘은 노화가가
사십년 연하의 여성과 결혼하여 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만약 그분이 \'나이값\'대로 행동했더라면
그토록이나 당돌한 혼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미국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예순살의 나이에 이십년 연하의 건달 남성과 결혼했다.
남이 뭐라고 하던간에 그녀는 \'나이값\'을 초월하여
순진한 소녀나 할 법한 로맨틱한 모험을 강행했던 것이다.

나이값에 걸맞게 살아가다 보면 빨리 늙고 빨리 허물어진다.
그러다 보면 괜히 억울한 맘이 생기게 되고,
그런 억울함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촌스러운 도덕주의자,
심통 사나운 권위주의자가 되기 쉽다.
젊은이들이 흥겹게 노는 것이 공연히 꼴보기 싫어지고,
그래서 걸핏하면 윤리 도덕을 부르짖어 가며
\'퇴폐추방\'을 외치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젊었을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요즘애들은 틀려 먹었어\",
\"술집하고 여관만 늘어가니 정말 말세야 말세\"
하는 따위의 말들만 힘주어 외치게 된다.
이것은 현진건의 단편소설 에 나오는
심술궂은 노처녀 B사감의 심리와도 통하는 것인데,
자기가 직접 연애를 해볼 생각은 하지 못하면서
공연히 연애하는 젊은이들만 들볶아대는 심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나는 내가 설사 지금 자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른바 나이값에 걸맞는 늙은 아버지 역할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글을 싫어하는 사람들 중엔 내가 쓴 야한 소설 같은 것을 보고
\"넌 자식을 가진 어버이의 심정도 모르느냐?
네가 만약 딸을 가지고 있다면 그따위 퇴폐적인 글을 쓰진 못할것이다\"
라고 야단치며 나무라는 이들이 많다.
그런 사람일수록 나에게 \'공인으로서의 사명감\' 따위를 설교해 가며
내 책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영향을 걱정하곤 한다.

글쎄......나는 자식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설사 내가 자식을 가진 아버지라 할지라도 자식에게 \'걱정\'을 핑계로
\'도덕적 설교\'를 퍼부어대진 않을것 같다.
오히려 나는 \'나이값\'을 하지 않고 계속 마음이 어린 상태로 머물며
자식들과 함께 철부지 소꿉장난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을 보다 야하고 자유롭게 키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폐쇄적 권위주의는
누구나 일찍부터 \'나이값\'을 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나온다.
이십대 까지는 진보와 개혁을 외치며
\'기성 세대는 물러가라\'고 떠들어대던 사람들도
삼십대 중반의 나이만 되면 다들 중늙은이가 되어 버려 가지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는 식으로 싹 얼굴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나이에 따라 서열을 따지고 어법(語法)을 가리고 옷차림이 달라진다.
신나게 춤추며 놀아보려고 해도
나이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디스코텍이 따로따로 정해져 있다.
연애를 하려고 해도 나이든 사람은 돈으로 \'나이값\'을 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정신적 청춘\'을 일찍부터 포기해 버리게 되어
할 수 없이 외형적 체면치레나 권위만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나이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온다.
\'청춘\'이란 말은 나이에 따른 일정한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여야 한다.
나이값을 하려고 너무 일찍부터 서둘다 보면
우리는 형편없이 겉늙어 버린다.
우리는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더라도
마음만은 계속 철부지 상태로 머물러 있도록 애써야 한다.


<광마 마광수>

 

|||